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7
‘슬픔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요즘 은혜를 사모하면서 그러는 동안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다. 역설적이게도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은혜를 잃어간다. 이는 율법이 무시되고 방조되기 때문이다. 은혜와 진리가 본래 율법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잊었다. 은혜 가운데 살면서 율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권리를 남용하면서 의무와 책임은 모면하려고만 하는 것과 같다. 현대인의 특징이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을 일컫는데, 특히 직장을 다니거나 어떤 책임이 막중한 사람들이 이런 증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른한 무력감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왜 그러는 것일까? 오늘 말씀은 이를 명확히 짚어주고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슬픔을 온전히 슬퍼하지 못함으로 참 기쁨도 상실한다. 빨리 어떤 문제를 모면하려고만 할 때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하게 되는 것과 같다. 임시변통으로 살아가듯 우리 영혼의 갈함은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기갈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하는 말씀을 오해하면 율법과 은혜를 대비함으로 은혜는 곧 율법을 멀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이해하기를, 은혜와 진리가 담길 그릇은 율법이라는 그릇이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좌고우면할 수밖에 없다. 본래 그런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법이 없이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없다. 은혜는 죄의 비례한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느끼는 만큼 은혜는 값지고 소중하다. ‘은혜와 진리가 본래 율법의 목적이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1장 강해>를 읽으면서 새삼 나의 어리석었던 방조와 외면을 깨닫게 하시는 하루였다. 형식이 무시되고 율법이 소홀히 되는 예배와 은혜는 마치 허당에 부어지는 값진 음료 같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2-3).”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더 이상 그림자나 예표를 구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요한복음의 1:17절 말씀을 히브리서 1:1-2절이 받는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표적을 구하고 어떤 ‘뜨거운 기적’을 바라는 신앙은 자칫 이단의 사슬에 매일 수 있다. 그래서 은혜가 율법을 폐하는 게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이는 요한복은 1장 17절의 해석이라 할 수 있고,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나오는 예화는 그에 따른 설명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날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다. 그때 큰 죄를 지은 여인이 예수 앞에 나왔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37-38).” 그 여인의 행동이 시몬의 눈에는 기이하고 부당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39).” 그 마음에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는 의심이 들어갔다.
그때 예수님은 동문서답하듯 또 다른 예를 드셨는데, 500 데나리온을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 받은 것과 50 데나리온을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 받은 것, 그럼 누구에게 더 은혜가 크겠느냐? 하시는 질문이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2).” 문제는 자기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게 죄다. 자기 죄를 인식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은혜가 그저 무덤덤하게 들리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빚이 적당하고 여겨져서 자기 힘으로 어찌 충당하고 산다는 식으로, 죄의 문제에도 안이하면 은혜도 그만그만할 뿐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고 배교하여 떠났다가 돌이킨 후에, 저에게 은혜란 그 이상의 소중한 게 없는 것이 되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데는, 보지 못하였으나 말씀을 들었음으로 믿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있다. 이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은혜의 정도는 자신이 사함을 받은 죄의 정도와 비례한다.> 그 죄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율법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재앙을 깨닫는 만큼 은혜의 크기가 다르다.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8-39).” 이를 요즘 묵상하고 생각하는 은혜의 연마로 가져오면, 나에게 두시는 고통이나 슬픔, 나를 엄습하여 쥐고 흔드는 것의 본질은 성전을 향하여 두 손을 들게 하는 일이다. 두 손을 드는 일은 항복이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데도 다만 ‘그럴 수 있는, 남들 다 그러고 사는 정도’로 여겨 슬픔을 애곡하지 않는다. 고통을 모면하려고만 하지 정작 그것으로 주를 바라려는 마음은 싹을 틔우지 못한다. 부친의 폐암으로 슬픔에 젖은 친구에게, 장애를 가지고 누구보다 일찍 몸의 질병을 느끼며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에게 나는 내가 아는 이 은혜의 자리를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얼른 이겨내면 될 일이 아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은혜도 반감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은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내가 아는 세상 친구들의 위로는 ‘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하는 식으로, ‘힘내. 얼른 잊고 기운차려야지.’ 하는 정도의 위로다. ‘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하는 소리 앞에 슬픔의 본질은 무너지고 교훈은 사라진다. 쉬운 믿음으로 참된 신앙을 대체하려 드는 게 오늘 날의 교회 현실이다. 위로와 격려를 우선으로 하는 사람과 사람 사는 이야기로 친목을 우선하는 게 복음의 역할이 되었다. 성경은 그런 와중에도 회개 없이 은혜는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나는 요즘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 앞에 바로 구원 받은 게 맞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런 의심이 불신앙의 것일 것 같지만 실은, 가벼운 믿음은 빠른 결단과 재촉하는 은혜로 믿음의 오해를 부추길 뿐이다. 자신을 되묻지 않는 신자는 가짜다. 가짜는 결코 가짜인지 되묻지 않는다. 무조건 진짜라고 우겨댄다. 다윗이 죄를 범하였을 때 저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았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문맥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고 자신에 대한 애정도 없는 듯, 저로 인해 직접적으로는 밧세바에게 간접적으로는 그의 남편 우리아에게 사죄하는 마음이 있을 법도 한데….
성경의 골격은 ‘먼저’가 있고 ‘나중’이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를 바로 알 때, 오는 시편의 간곡한 기도가 내 것으로 온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시 28:7).” 가령 십계명의 경우도 앞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하고(1-4 계명), 나중에 사람과의 관계를 정하셨다(5-10 계명). 실제 살인하고 간음하는 죄가 사람과 사람 간의 죄인 것 같으나 앞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망각한 죄가 된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으로 섬긴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거룩함보다 행복함을 먼저 추구하며 교회를 다니는 이상, 말씀을 상고해도 그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면 이는 모두 허사다. 거짓된 것이다. 오직 우리의 자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그리하여 나는 누구를 생각하며 저를 위해 주께 기도하다, 내게 더하시는 은혜에 놀라고는 한다. 누구 일로 마음 쓰고, 저와 통화하며 뭐라 권면하다, 말씀으로 그리 일러주려 하는 나를 마주하면 말이다. 보면 내게 더 은혜의 정도가 과분하여 송구할 따름인 것이다. 나의 죄가 결코 저보다 적어서, 이제는 완전하여 전하는 말이 아니다. 결코 저와 다르지 않다는 데서 주께 부끄러워지고, 저보다 더한 것에 차마 머리를 들지 못하겠고, 그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주 앞에 더욱 엎드리게 된다.
오늘 우리 영혼의 기근은 무엇인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씀이 갈함이다. 말씀을 멀리하고, 율법을 매도하며 소홀히 여길 때 은혜는 축소되고 행복만 추구하는 신자로 전락한다. 물론 그 행복이란 게 이 땅에 사는 여느 '남들처럼 사는' 정도로 말이다. 이를 앎으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시 28:1).” 하는 다윗의 절규가 그 의미를 더하며 내 것이 되게 한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곧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7).”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