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전봉석 2020. 11. 20. 06:00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오바댜 1:15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4-5

 

 

 

곧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하시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소망으로 다가온다. 살면서 사느라 다들 애쓰는 것에 나는 때로 슬퍼한다. 나의 슬픔은 모르고 있다가 누구의 소식에나 저의 어려움을 보면서 사는 일이 새삼 그 무게를 더하는 것을 느낀다. 코로나가 다시 확산하고 있는데 누구는 다 늙어 무슨 기술학교에 입소하였다. 가까운 동네 어디에서는 불이 나서 3명이 죽고 공장은 전소되었다. 나는 경고 문자와 함께 매캐한 냄새로 그 사실을 실감할 따름이다. 이 외에 살아가는 이야기가 모두 남의 이야기만 같다. 나의 이야기는 더 이상 주목받지 않고, 나는 온전히 주의 살아계심과 그의 역사하심에 따른 이야기에 하루씩 하루를 더 보태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연일 누구와 누구의 대립을 부각시켜 진영 논리와 당파 싸움에 불을 지피고, 누가 ‘비혼임신’을 하면서 이를 부추겨 보도하는 행태가 마뜩치 않은 하루였다.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세상에서 나는 오늘 시편의 기도로 나를 근신한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

 

이 땅에서 사는 것으로 사는 일의 전부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사는 게 뭐 있겠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 원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능사이겠다. 그러니 세상은 이를 모를까?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데 뭐라 하겠나? 자기 몸이고 자기가 그 주인이고 주체라는데 누구 말을 듣겠나? 나는 요즘 확신하는 게 이 땅에서의 평화주의는 이단이고, 세대주의도 이단이다. 같은 시대를 살며 동시대의 공통된 의식을 신봉하고 비슷한 연령끼리 뜻을 다하는 것은 배역이다. 우리의 옳고 그름의 판단조차 세대에 따라 굳건한 듯 변질되고, 세대와 세대의 갈등은 고조되는 것인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말씀으로 우리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따름이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우리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이를 알게 하는 일이 율법이다. 나는 구제불능이고 자격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그러할 때 나의 실습교재는 세상이다. 내 곁에 두시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소식이 실제의 학습효과를 주는 것 같다. 저들은 참 안 듣는다. 들을 수가 없는가. 일단 거절한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저들을 보면서 나의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7:14).”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나도 결국 육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절규하는 고백과 같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내가 원하는 것,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온전히 주만 바라며 섬기기를 원하는데, 어김없이 나의 염려와 근심은 세상을 기웃거리게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즉 나는 한없이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의 죄는 구제불능이라는 사실과 그로 인하여서도 주의 긍휼하신 은혜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16-17).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 어떤 사연을 안타까워하다, 나는 우리의 그럴 수밖에 없는 본능에 치를 떨며 주의 은혜의 품으로 안긴다. 살려주세요, 하는 애원밖에는 할 게 없는 것이다. 그렇듯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그러니 내가 누구를 안타까워하고 뭐라 하다, ‘그게 너다!’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바울의 절실했던 자기 성찰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더욱 주께 의뢰하였는지 알겠다.

 

그래서 저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기쁨과 은혜의 소망을 잃지 않은 것이겠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실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전한 말에 자신이 다하지 못할 것을 알아 더욱 주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결의다. 그래서 저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이는 모든 사람의 고통이겠으나 나만의 절규이기도 하다. 곧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아, 우리는 이처럼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단순히 받아 넘겨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누구의 비혼임신 소식이, 어느 정당의 차별금지법에 뭉쳐 주장하는 것들이나, 어느 가정의 가장이 돈이면 다 된다는 자녀 교육이 모두 우리에게 하나님이 펼쳐 보이시는 시청각교재다. 저들로 비탄해하다 내가 절규하는 이유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를 애통하면 할수록 주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감사뿐이 남는 게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이러한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 그래서 은혜를 더욱 은혜로 소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었다. 구원을 바로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알게 한다. 죄의 깊이를 모르면 내게 주신 은혜의 깊이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 때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교만이 자란다. 오늘 오바댜는 이를 진술하고 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3-4).” 그렇게 내가 얼마나 잘났든 하나님은 나의 높임을 끌어내리신다. 또한 우리의 교만으로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다닥다닥 붙어살아야 하는 주제들이 날마다 싸움이다. 대통령의 지지와 반감이 편을 가르고, 당파싸움은 이권에 눈이 멀어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정책을 쏟아낸다. 어디서 누구에게 옮을지 모르는 전염병이 창궐하는데도 설마, 하는 안일함이 우리의 일상을 흔든다. 그저 다들 비열한 도시에서 산다. 이 땅에서의 생존을 위해 영혼을 돌볼 겨를이 없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8-19).”

 

문득 누구와 통화하다, 또는 저의 사연을 듣고 뭐라 일러주다, 그야말로 나나 잘 사는 게 상책인 듯 저마다 참 복음을 싫어하는 것을 느낀다. 사는 이야기에 전념하다 말씀을 이르려 하면 대화는 끊기고 통화는 어색하게 끝이 난다. 다들 행복하길 원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마다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 나온 말로, ‘사람이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믿게 되고, 또 살아가는 데 그것은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니 오늘도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어디에 관심을 두고 눈을 뜰 것인가? 젊은이는 주식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장년들은 부동산이 행복의 전부이며, 노년층은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를 꿈꿀 따름이다. 몽상가 바슐라르의 주장처럼 ‘누구에게 꿈꿀 권리는 있다.’ 어쩌겠나? 저마다의 관심이 곧 말끝마다 말을 더하는 것이고, 말이 좌우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인생이라면… 비혼임신을 예찬하든, 연일 상한가를 치는 주식에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오거스터스 탑레이디의 시를 한 편 옮겨 적어 메모해두었다.

 

내 손의 수고로

율법의 요구 채울 수 없고

쉼 없는 열심과

늘 흘리는 눈물로도

죄를 속할 수 없나이다

주여,

오직 주께서 구원해 주셔야 하나이다.

-오거스터스 탑레이디

 

어제는 저의 시를 종이에 적어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새로운 날 아침, 다윗의 시를 천천히 읊조리며 되뇐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중략)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 30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