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3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시편 31:1
사느라 다들, 아득바득 기를 쓰고 산다. 친구는 하루하루의 삶을 무슨 미션을 수행하듯 하여 ‘미션 클리어’의 일상을 산다. 사느라 사는 데 온통 애를 써야 하는 까닭은 죄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그도 그럴 것이 저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요나도 같았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참 희한하지? 마침 그럴 때 배를 만나 여호와의 얼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것을 아시고,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그 물고기 뱃속에까지도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은혜란 참으로 희한하기가 우리의 죄 그 이상으로 넓고 깊고 높으시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하는 저의 기도에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랐다(18). 저마다의 삶이 사느라 사는 데 따른 ‘물고기 뱃속’ 같은 경험을 하지만 동시에 그런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의 놀라우시고 풍성하신 은혜를 마주하게 된다. 가령 내가 늘 돈에 여유가 없어 돈 때문에 쩔쩔매며 주의 이름을 불렀더니, 아무리 기도해도 돈은 주시지 않고 오히려 돈이 없어도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신다. 또는 늘 어디 몸이 아파서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더니, 몸을 낫게 하시기는커녕 심지어 불안증을 더해서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심이 아닌가? 이것이 내 죄로 인해 덧씌우시는 올무인가 여겼더니, 그 안에서 주의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사모하는 참 자유를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하는 기도가 내 것으로,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성경 어디를 펼쳐도 구절구절 그게 다 나에게 들려주는 말씀인 것을 알게 하셨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다 내 것이었다!
누구와 통화하다, ‘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두신 걸까? 하나님의 뜻이 무얼까?’ 하고 묻는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것까지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하고 말해주었다. 왜? ‘왜?’라는 질문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도 없다. 어디가 아플 때, 무슨 일이 닥쳤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나님은 내게 원하시는 게 무얼까?’ 하고 묻는 것은 어리석었다. 이번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자가 아들을 앞서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두 컷 만화에서 위로를 받았다는데 바로 그 대답이 이것이었다. ‘왜? 왜 너여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때로 우리를 뭄 둘 바 모르게 하신다. ‘왜’에 대한 답은 이미 ‘물고기 뱃속’에 있다. 특히 나를 아는 누가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가 자주 묻는 말이 왜? 하는 것이다. 목사가 되었어! 왜? 불안증이 있어! 왜? 그러니 무엇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나는 이 은혜를 오늘 시편의 기도로 가름할 뿐이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 31:9).”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10).” 왜? 잘 알고 있잖아! 한사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살려 하니까!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23).”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다. ‘나를 사랑해라.’ 돈? 건강? 좀 더 여유로운 일상? 그에 대한 답은 하나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우리는 그 ‘물고기 뱃속’ 같은 팍팍한 삶의 현실에서, 비로소 답을 구한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14).” 누구는 모태신앙으로 평생 믿음의 가정에서 나름 믿는 자로 살았다. 교회를 떠난 적 없고 봉사와 헌신도 하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자부하였다. 그러다 요즘, 부친의 소세포폐암선고 앞에서, 저의 ‘물고기 뱃속’에서 저는 알았다. 내가 한 번도 성경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더라! 요즘 시편을 읽고 있는데, 처음으로 말씀을 읽는 것 같아! 저의 문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인사가 나왔다. 희한하지?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저 이상하고 희한하다. 돈이 좀 여유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더니 돈은 안 주시고, 돈 없이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자유를 주셨다. 어디 좀 아픈 데 없이 낫게 해 달라 기도하다, 하다못해 불안증이라도 좀 벗겨주시면 내가 더 멋지게 목회를 할 수 있을 텐데요… 하고 이런저런 꿈을 제시하였더니, 어제는 오히려 자다 깨서 무엇이 또 마음을 어렵게 하는지 내내 뒤척이며 불안해 하다 결국은 안정제를 먹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아침, 요나를 마주하게 하시더니 다윗의 기도가 내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15).” 이를 일찍이 모세도 알고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면서, 동시에 오늘 이 아침, ‘요나의 이야기’가 요, 나의 이야기로 들리게 하시는 것이다. 나야말로 늘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살았던 자가 아닌가? 불안증으로 더해 옴짝달싹 못하게 하신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자로 살게 하시고 계셨다. 몸은 자꾸 어디가 아파서 이틀이 멀다하고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야 하고, 돈이 없어 자주 궁지에 몰리는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감사가 넘쳐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 월세 한 번 밀린 적 없고, 읽고 싶은 책을 못 산 적 없다! 그래도 내 발로 걸어서 이른 아침이면 주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고, 주의 성전에서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더하시는 거였다. 묵상글을 쓰고, 보잘것없으나 누구와 함께 읽을 수 있어 누가 물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 은혜의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나는 더 이상 ‘왜?’ 하고 묻지는 않는다.
왜? 그것까지도, 굳이 내가 안다고 뭐 달라질 게 아니라면 ‘물고기 뱃속’도 주의 은혜의 자리였다. 모세도 다윗도 앞선 믿음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같이 알고 있었다. 주의 말씀은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살 궁리에, 가족들 건사에, 주어진 하루 일과에, 맡은 바 그 책임이 날마다 반복되는 ‘미션 클리어’ 같이 너무 과중하였던 것은 요나처럼 요, 나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말인즉 주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정작 가라 하시는 ‘니느웨’로는 가지 않고, 슬그머니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로 내려가는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는 것이다. 당장 아이 밥 차려 먹여야 하고, 씨도 먹힐 것 같지 않은 저들의 짐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일처럼 여겨 그 무게가 힘에 벅찬 것이다. 돈? 건강? 그런 것도 다 마찬가지이다. 돈 없이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어디 아픈 몸으로 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불안까지 쥐고 흔들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이제 확신한다. 바울의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려 하심인 것을 말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렇지 내가 이처럼 약하지 않았다면, 여기가 물고기 뱃속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주의 이름을 이처럼 간절히 사모하며 살 수 있었을까?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성경은 내게도 일갈하신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내가 주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이다.’ 왜? 범사에 주를 인정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곧 은혜의 한 비결을 알았다. 돈이 좀 있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몸이 좀 덜 아프다고, 또는 불안이 없다고 해서 더욱 간절히 주를 사모하며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내가 아는 나는 여기가 ‘물고기 뱃속’이라 해도, 가장 자유롭고 여유롭고 만족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은혜이다. 은혜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어제는 더욱 놀라운 보물 하나를 얻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아, 이 의! 내가 열심히 ‘미션 클리어’ 하여 삶을 살아서 이룬 의가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오늘의 나는 결코 나의 성실과 노력의 성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이 머리 한 톨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 누구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만이 거저 얻은 것이다. 한다면,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해서 그게 결코 모순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던 문학? 나의 이상과 꿈? 나름의 꿈꾸는 훌륭한 목회자의 삶? 심지어 가족들 하나하나의 이런저런 모양? 또는 내게 주어진 이 몸 하나? 나의 남은 생을 전부 다 바친다 해도 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나는 이제 알았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자식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김은’ 그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 즉 나의 나름의 ‘미션 클리어’ 같은 일상의 수고와 열심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로 내게 주신 이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니’ 우리에게 은혜란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보다 더 엄청난 사실과 소망은 없다.
나는 이제 이를 잃지 않기 위해, 욥의 고백처럼 ‘설령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저를 의지할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왜? 그는 선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어찌하시든지 그는 선하시다. 그러므로 설령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시 31:22).” 그러하다 할지라도,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23).” 그렇게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