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믿음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렇게 그냥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2).” 그래서 찰스 웨슬리도 기도하였다.
나 이제 정죄가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내 것이니
살아있는 머리 되신 주 안에 살면서
거룩한 의의 옷 입고
영원한 보좌 앞 담대히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내 것이 된 면류관 얻으리라
이를 또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 하는 찬양으로 응수하는 것이다.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도 자의로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이유다. 세상 지식으로는 계시의 말씀을 듣거나 알지도 못한다. 오직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으로 내 안의 주의 영이 이에 합하여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은 덧붙여 이르기를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9).” 여기서 ‘무지한 말’이란 아직 어린 종자로 사람들 태운 적 없고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다. 천방지축 자기 멋대로 구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이 자라지 못하면 그러하겠다. 성경에서 무지는 죄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지 못하면 영생도 없다. 뒤이어 ‘노새’는 단순히 늙은 말을 일컫는 게 아니라 완고하여, 자신의 경험과 공적에 확신을 두지만 기력이 다한 말이다. 저들에게는 형식과 원칙,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여 사람에게 보이는 자신을 우월하게 여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공통적으로 무지한 말이나 노새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해야 한다. “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곧 쓸모가 없고 고약하기만 하다. 우리 안에 심성이 그러하고 감정과 느낌이 다르지 않다. 울컥하듯 이는 마음의 동요를 은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눈이 핑, 돌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정도는 순간의 느낌일 수 있지 만 그것으로 계속되는 것이 정상은 아니다. 성령의 삶은 일상이 곧 답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다고 하셨는데,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 씨앗이 땅 속에서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더는 얽매이지 않고 삶으로 살아서 찬양으로 산다. 뭘 꼭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버려졌거, 잘했다고 여기는 자신의 자부심도 버려졌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 당위적인 삶에 익숙해진 판단과 기준은 이상하게도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리기보다 남에게 겨누는 총구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를 비난할 것도 비판할 것도 없다. 헤아리는 그 헤아림을 우리가 헤아림을 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저의 죽으심으로 더는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다. 율법을 두고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로 여전히 괴로워하는 것도 누구를 나무라도 것도 옳지 않다. 이를 두고 우리를 고소하는 것은 사탄뿐이다. 사탄의 일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2-3).” 저는 우리에게 흠결이 있어, 우리를 주 앞에 세우고는 정죄한다. 죄를 끄집어내어 ‘그슬린 나무’ 같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께서 그 ‘그슬린 나무’ 같이 쓸모없고 더러운 우리의 과거를 책망하시지 않고, 이를 정죄하는 사탄을 책망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4-5).”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게 무슨 자격으로! 그것은 오늘도 하늘 우편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심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는 정죄함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지나간 죄에 얽매여서 자책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힐 이유도 없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힐 것도 없다. 그 모든 허물의 값은 이미 다 지불되었다. 나의 의는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 죄를 짓거나 또 다시 실패한다고 해서 구원을 의심해서도 안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성령이 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대신 또 간구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럼에도 여전히 ‘무지한 말’로 또는 ‘노새’와 같이 자신을 굴려서 멋대로 굴려는 ‘그슬린 나무’와 같은 속성을 버려야 한다. 공연한 자책도 실은 회개가 아닌 사탄의 술수다. 죄의식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지만 회개는 다시 딛고 일어서서 주 앞에 나아가게 한다. 전과 달리 더는 그런 자신의 일로 침잠하지 않는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 2:1).” 우리는 그럴 수 있고, 충분히 그래야 하는 유전인자를 가진 자들이다. 주를 사모하는 마음은 창세 전에 이미 택정하시고 예정하심으로 심겨져 바 되었다. 비록 깊은 바다 속에 던져졌진 것처럼 암울한 현실에서도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4).”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다.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는 담대함으로 주 앞에 나아간다.
예수의 피와 의
내 아름다움, 내 영광의 옷이니
불타는 세상 속에서 이 옷 차려입고
기쁨으로 내 머리 들리이다
-친첸도르프
저의 기도가 오늘 본문의 요나의 기도와도 다르지 않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5-6)
우리에게는 기도라고 하는 놀라운 유전인자가 있다. 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을 때, 그 코에 생기로 불어넣으신 증표다. 이제 우리는 율법대로 산다! 이 놀라운 역설 앞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하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다시 말하면, 더는 예전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즐기고 의지하던, 사람과 놀이와 문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위로 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과 대적한다. 말씀에 거스르는 것을 멀리한다. 그러하였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을 찬양한다. 이를 위해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이 되셔서, 율법의 요구가 되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그래서 은혜와 율법은 하나다. 은혜 없이 율법을 따라살 수 없고, 율법이 아니면 은혜를 알 수 없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다. 완성하러 오셨다. 주의 말씀이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를 응하게 하시는 삶이다. 사는 게 지옥 같다면, 여전히 스올의 뱃속에 거하는 것 같다면, 율법주의자로 얽매여 있거나 그 경계를 넘지 못한 까닭이다. 율법이 우리로 죄를 혐오하게 한다.
나는 종종 예전의 친구가 그립다. 예전의 선생과 같이 나누었던 문화와 문학을 떠올린다. 그러면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가 이제는 선명하다. 주를 거역하고 배제하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 마음에 모시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런 문화에 동조하였던 나의 날을 혐오하게 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무엇이 불법인지, 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 이를 우리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셨다. 곧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이는 결코 세상을 역행하는 게 아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 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더는 그런 것에서 자유롭다. 우리는 은혜 받은 자로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이를 완성하는 데 있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 들은 바, 말씀을 행함으로 율법의 완성을 맛본다. 하루의 기쁨을 누린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은 명쾌하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더 무얼 원하는가?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감사하였다. 어제는 부모님이 오셨고, 이번 주일은 같이 추수감사주일로 성찬식을 거행할 것이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마침 나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서로들 나이를 세고, 그 시절이 어떻게 흘러 갔는가. 딸애가 찍은 사진 속의 나이든 나의 모습은 늙으신 부모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전적으로 믿는 자의 특권이겠다. 그리스도인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안 믿는 자들은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에 연연하나 우리는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데에 감사한다. 늙음에서도 자유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기도로 감사를 올리는 지금이 복되다. 이제는 확신한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시 32:7).”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이 율법의 자유함에서 그런 맥락을 짚었다. 믿음으로 신앙을 지키며 사는 일이 고역이 아니다. 의무도 아니다. 의를 이루는 일도 아니다. 마땅한 자유고, 참 누려야 하는 영광이다. 그래서 더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말할 수 없는 이 은사로 말미암아 나는 감사한다. 이제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11).” 요나의 기도는 적중하였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고통마저도 우리에게는 헛되지가 않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오늘 성경의 약속이 나는 참 좋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10).” 그러므로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