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전봉석 2020. 11. 24. 05:53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9-11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즉흥적이고, 자기 생각에 이끌려 자신을 옳다 여기는 요나의 성질이 꼭 나 같다. 요, 나는 당장의 것에 성을 내고 분을 참지 못하고 우울하고 좌절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저를 다독이시며 인자하심으로 이끄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그러자 화가 잔뜩 난 요나는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고 성질을 부린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시며 저들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신 데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주고 계신다(욘 4:9-11). 오늘 말씀을 이처럼 풀어보는 것은 이런 일이 우리 생활에서 비일비재하게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그런다. 욱, 하고 화가 치밀어오를 때는 순간 내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이다. 그 분노는 억울함으로 바뀌면서 묵은 시절의 서러웠던 것들까지 끄집어내며 남을 탓하다, 나 자신을 묵사발나게 짓이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를 저지하시며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주의 손길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 73:2).”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손길이 나를 붙드셨다. 이는 내가 돌이켜 목사가 되고 난 다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살 때도 그때마다 주의 은혜는 어김없이 나의 곁을 지키셨다. 전혀 그럴 수 없는 형편에 누구의 손길을 동원하여 신학 학부를 다시 하게 학자금을 전액 지원하게도 하셨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죄의 현장인데도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궁지에 몰리기 전에 그들의 손아귀에서 놓여나게도 하셨다. 모 협회는 정부지원을 받으며 운영되는 단체로 회장과 부장이 그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부장은 우연히 만난 동창이었고, 저들의 횡령을 무마하며 눈감아주는 가름막으로 나를 기획실장에 앉혀 저들이 발행하는 잡지를 3년 정도 맡아하게 하였다. 전국규모의 단체여서 이런저런 감사가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저들의 공치사를 책자로 엮어 홍보해주는 역할이었다. 출퇴근도 자유로웠고 월급은 여느 위치보다 후하였다. 저들끼리 고소고발이 일어나기 직전 기적처럼 나는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다. 회장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고, 그의 요구를 더는 들어주는 게 환멸과 모멸감으로 일어나 사표를 쓰고 나왔다. 그리고 일 년 뒤 저들은 감사에서 비리가 들통나서 재판을 받고 구속되었고, 저들끼리 싸워 새로운 이가 후임이 되었다. 그런데 후임 회장으로 된 이가 또한 나도 친분이 있어 퇴사한 나까지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그때 일을 자세히 열거하기는 어려운 것이 여전히 그 단체는 운영이 되고 있어서이다.

 

이와 같이 그런저런 우연곡절이 누구의 인생엔들 없겠나만 그때마다 요나의 목소리는 타당하게 들리기도 하다. 저의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 줄 알고 자신이 그 일을 안 하겠다고 한 게 아니냐? 하는 소리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1-2).” 니느웨성이 돌이켜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고, 이를 두고 요나가 성질을 부리며 하는 소리다. 그러면서 저는 자신을 변명하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뭔가 좀 화끈하게 저들을 벌하시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안 그러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연마하시더니, 이번에는 박넝쿨로 가르치신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도 예비하’셨다. 대머리인 요나의 머리를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가리게 하셨으니,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이 벌레도 예비하’셨다.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었다. 또한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도 예비하셨’다. 금세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였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며 괴로워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다. 주의 은혜에 나는 새삼 감복한다. 나의 고질적인 열등감과 우울감과 자격지심에 대해 잘 알면서도 그것은 순간 욱, 하고 화로 치밀거나 금세 꺼지며 심한 우울감으로 젖어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끄러져 그릇된 길로 갈 판인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손길을 펴고 나를 말리시고, 진정시키시고, 주의 은혜를 가르치신다. 바울에게도 그러하셨던가 보다. 저도 몸에 가시가 있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2:9).” 저라고 이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겠나? 그러할 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0).” 나도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누가 과감히 말하길 목사님은 장애가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그것으로 주의 은혜를 즉각적으로 느끼실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하는 저의 말이 당돌하였지만 그 부러워한다는 말에는 안 됐기도 하고 갸륵하기도 하였다. 내게 두신 은혜가 족하다. 나의 능력,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갈망하게 하는 힘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제는 부인하지 않는다. 종종 고백하지만 이처럼 일찍 일어나 앉아 묵상글을 쓰면서도, 몸이 현실로 돌아오는지 싸--하게 번지는 불안을 느끼면서 얼른 안정제를 삼킨다. 누가 들으면 개도 웃을 일이지만, 주의 말씀을 사모하다 저의 사랑과 은혜를 한 몸에 받고 사는 것처럼 확신하다가도 불안이 일면 감당할 수가 없다. 특히 주일날 예배에 앞서 나는 평소보다 두 배를 먹는다. 누구와 신앙 상담을 하다가 감정이 너무 이입되면, 저의 앞에서도 염치불구하고 안정제를 삼키기도 한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솔직히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이 좀 야박하신 것 같다. 악할 대로 악한 성을 멸망하시기로 하셨다가 저들이 회개하는 것으로 멸망을 늦추기를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리하신다는 분이 주의 자녀에 대해서는 다소 엄격하신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는 요나가 분내는 것에 공감한다. 그래서 안 하겠다고, 안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강제로 이끌어 여기까지 오게 하시고는, 어차피 주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리실 것을 왜 나를 생고생을 시키시는가 말이다. 가끔은 누구를 대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가 나를 우습게 여기는데 굳이 내가 저에게 뭐라고 자꾸 신경을 쓰고 기도하게 하시는지. 탐탁치가 않아 뚱하다가도 결국은 하게 하심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사랑한 것을 크게 공감한다. 나도 나의 약함을, 이제는, 사랑한다. 나의 이 약함이 내 안의 탐탁치않아 하는 마음을 이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점점 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시작하신 이가 어떻게든 이끄실 것을 안다. 안 한다고 하면? 할 때까지 물고기 뱃속에라도 쳐넣으시는 은혜다. 죽어라 하고 늦추고 도망가는 동안의 생고생은 오롯이 내 몫이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뭔가 대단한 것을 통달한 게 아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2).” 이는 결코 자랑하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저도 자기가 하는 게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곧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그 능력은 우리의 약한 데서 나온다. 내가 교만할 때는 내가 좀 알아서 할 것 같았는데, 어김없이 거기는 물고기 뱃속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주께서 이끄시고, 도우시고, ‘그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이를 알면 알수록 은혜에서 떨어질까 두렵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새벽마다 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나는 이제 이 시간이 나의 하루의 정점이 되었다. 이 시간을 잘 마주하기 위해 종일 책을 읽고, 누구 생각을 하고, 아픈 아이의 하루를 점검하고, 똥을 싸고 밥을 먹고 잔다. 좀 우스운 소리 같지만 은혜의 이 시간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은혜를 더욱 실감하고 누리고 확장하기 위해, 나의 남은 하루는 온통 여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메모하는 일도, 책 보고 생각하는 일도… 그렇게 모여진 묵상글이 설교가 되고 나의 양식이 된다.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 같은 시간이 은혜의 자리였다. 그래서 더욱 사모하면 할수록 나의 전부를 걸 수밖에 없다.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자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계심을 나는 이제 잘 안다. 뒤늦게 당도하여도 늘 먼저 와 계신 것이 주의 은혜였다. 돌아보면 어느 한 순간순간도 은혜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죄 중에 빠져 죽은 자로 살던 때에도 말이다. 주의 은혜의 대명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심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이를 얼마든지 뒷받침할 수 있다. 다윗의 심정이 죽고 싶었을 것이다. 왕의 신분에 쫓겨다니며 미친 체 하여서 간신히 살아나온 주제인데,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 이게 도대체 사람의 이성과 이생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는 말인가? 저가 아주 거짓말쟁이로 능청을 떠는 게 아니라면, 저의 고백은 그저 터무니없기만 하다. 그런 그가 전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 하나님은 결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주의 은혜는 어찌 말로다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하고 다윗은 그 환멸과 모멸의 심정으로도 주를 송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맛을 안 보면 모를까, 한 번 이 맛을 본 사람은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 즉 우리가 어찌 좀 해서 이루어가는 구원의 삶이 아니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0).” 내가 어찌 좀 해보려고 하는 동안은 어림없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 내가 아는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라 어찌 말로 고백할 때 벌써 이미 변색될 정도로 청아하다. 그래서 나는 이 새벽을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왜?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