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미가 2:1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36:4
저들의 하루는 침상에 들면서 시작된다. 하면 그 하루의 시작에서,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미 2:1).”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가. 주로 어떤 마음이 먼저 드는가. 그 손에 힘으로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가. 하는 데 따라, 화 있을진저! 우리의 고질적인 본능은 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시 36:4).” 먼저는 생각이 들고 이어서 몸이 따른다. 악한 길에 서고, 이를 거절하지 않는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데 있어,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1-2).” 마치 미가의 서두와 오늘 시편의 서두의 말씀이 서로 맞물려서 한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을 상실했을 때는 자신이 더듬어 찾는 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에 이른다. 악은 드러나지 않고 미워함도 받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3).” 성경을 아는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그쳤다. 성경은 내가 아는 게 아니라, 계시다.
나는 이 계시라는 말씀이 요즘 조금은 실감이 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이처럼 미가서 2장과 시편 36편이 같은 점을 가리키는 것 같이, 내가 이 새벽을 사랑하는 까닭은 전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열어보이심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의미는 물든다는 의미로 ‘밴다’, ‘스며들다’에 가깝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들음은 숨길 수 없는 삶이 된다. 냄새가 배듯, 물이 들어 얼룩이 지듯, 우리 몸에 어떤 증상이 생겨나 남은 평생을 같이 가야하는 일과 같다. 가령 기질이나 성향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그것을 주께서 붙드시고 사용하시는 것인데, 이를 주장하는 것이 말씀이거나 세상-사탄의 권세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말씀이 주장하실 때 세상은 물러난다. 침상에 들어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대한 것은 가장 원론적인 문제이면서도 온통 기울어 있는 마음-관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돌아누워 나는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잠든다. 새벽이면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앉아 말씀을 끌어당긴다. 어제도 오늘도 죄에 대한 언급으로 여신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시 36:4).” 우리의 생활이 어째서 팍팍한가? 믿는 자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시는 것 같으니 어쩐 일인가? 그 마음에 서러움과 억울함이 가득하니 무슨 일인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죄의 역할은 우리로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몰골에 환멸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도 한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모르는데 주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겠나? 우리 생명의 원천은 주님이시다. 주의 자녀가 아닌 경우면 모를까 우리 안에는 주의 빛이 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본다.’ 그런데 어째서 주의 자녀나 세상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이 뒤엉겨 사는 것일까?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주장하지 못하신다함은 우리 속에 ‘세상’이 가득하다. 염려와 근심으로 꽉 차 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주께 더욱 의뢰할 것 같은데 죄의 본질은 그래서 더욱 자기 의를 구한다.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그래서 선하다는 주장이다. 자기가 자기를 주장할 때 말씀은 멈추신다. 기다리시고 가만히 놓아두신다. 왜? 뭐라 한들? 말씀은 듣는 것이지 아는 게 아니다. 듣는 것,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러다 누가 그 부분을 말해주고 건드리면 순간 적개심부터 든다. 감사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누가 핀잔을 감사하며, 책망을 감사할 수 있을까?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그만큼 인정하고 통회하는 자이다.
즉 죄를 죄로 여겨 자신의 죄로 자신이 지쳐 그 영혼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욥의 감사는 어처구니없는 것 같으나 주를 신뢰함이 아니면 죽는 게 더 낫기 때문이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아, 이 아름다운 고백이 아무나의 것이겠나? 우리 믿는 자는 결코 아무나가 아니다. 나는 친구가 아버지의 폐암으로 힘들어할 때, ‘하나님의 관심은 너다.’ 하고 일러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나름 자신은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살았는데 아들이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 젊음을 암울한 가운데 있어 한숨을 길게 쉴 때, ‘하나님의 관심은 너다.’ 하고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든 종종 확신을 더해 그리 말해준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전히 ‘나다.’ 세상이 어쩌고, 나라가 어떻고, 모두 다 어떠하다 한들 하나하나, 우리들은 개별적인 하나님과의 일대일이다. 그래서 나도 감히 자신하기를, '성경이 우릴 구원하는 게 아니다.' '예수의 가르치심이 우릴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저가 보이신 삶의 모범이 우리로 은혜의 삶을 살게 하시지 못한다.' 저는 단지 우리의 선생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성경일 뿐이다. 예수의 가르치심이 아니라, 예수 그 자체. 성경은 하나님 그 자신, 그를,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 우리 가운데,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 나의 침상, 이 새벽에 일어나 내가 하는 이 묵살 글쓰기의 유익은 은혜 그 자체이다. 저들의 시작은 침상에 잠자리에 들며 눈을 감을 때일지 모르나 우리의 시작은 이 아침, 눈 뜨고 먼저 무엇을 생각하고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어디가 아픈, 나의 몸으로? 당장 오늘까지 결제해야 하는 공과금으로? 애들 밥 차려 주는 일로? 어떤 염려와 근심으로? 성경은 모형이고, 말씀은 내 안에 깃들어야 하는 들음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자는 인색하다. 냉랭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자조적인 언사뿐이다. 또는 형식을 부정하고 내용만 추구하는 자는 자기 환상에 빠진다. 현실을 딛지 못하고 자꾸 낭만을 꿈꾼다. ‘그때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일한 불평과도 같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21, 32).” 그렇듯 우리가 꿈꾸는 낭만은 불평의 산물이다. 지금은 싫은 것이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하는 게 낭만이다.
이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앞에 계신 예수를 부정하는 일과 같다. 주신 한 날의 삶을 두고, ‘~할 수 있다면’, ‘~만 된다면’ 하는 식의 적용은, 그리 두신 이에 대한 불평이다. 가령 우리 아들이 우울증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열심히 살 수만 있다면… 하는 친구의 말처럼. 우리 아버지가 이번 폐암을 잘 견뎌 이겨내실 수만 있다면… 하는 식의 기도처럼. ‘~이라면’은 현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현재를 그리 두시는 이를 앞에 두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누구와 통화하면서 나는 그 부분을 자주 강조하곤 한다. 오늘이 아프면 ‘아픈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나야말로 가지가지 한다고, 요 며칠 뭘 했다가 오른 팔에 ‘엘보우’가 왔다. 팔꿈치가 아픈데 이렇게 글을 쓰다 멈추면 통증이 더한다. 팔을 펴면 찌르는 듯 아프다. 며칠째 파스를 붙이고 산다. 별 수 없다! 할 수 있는 걸 해! 늘 내 안에서 주시는 마음이다. 화가 났어? 속상하고 우울해? 오늘은 유난히 더 불안해서 진정제를 몇 개씩이나 더 먹었어? 그러니 어쩐다? 나는 자꾸 그런 데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이는 먼저 그리 두시는 이를 생각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말이다. 아프니 파스도 붙이고, 못 견디겠으면 진통제도 먹고, 결국 병원에도 가고 하겠지만 어쩌겠나? 그게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픈데 뭐? 우울하니 어쩌라고? 돈이 궁지로 몰려 카드로 생활하는데? 그래서?
그러한 현실은 ‘그래도 계속 할래?’ 비웃는 것 같다. ‘엘보우’가 묻는 것 같다. 오늘도 묵상글 쓸래? 저리고 시린 다리가 빈정거리는 것 같다. 그래도 책상에 앉아 설교 원고를 쓸 수 있겠어? 아픈 아이가 자꾸 헛소리를 하며 묻는 것 같다. 그래도 날 사랑할 수 있겠어요? …… 그러니 어쩐다? 내가 하려고 하면, 저런 인간-'나'를 어찌 사랑하겠으며, 이런 나 자신을 어찌 돌보고 살겠나? 내가 하려고 하면 자식새끼도 거슬리고, 마누라도 짜증스러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매일 들리는 소식은 우울한 것뿐이고, 정치는 지겹게도 싸우고, 경제는 우울하고, 사회는 곪아터져 악취가 난다. 그러니 살맛이 나겠나? 내가 살려고 하면, 사는 게 지옥이라. 다들 산다고 사는데 그 삶이 너무 지긋지긋한 거라. 그러니 어쩐다? 누구처럼 눈 딱 감고… 죽어? 그럼 좀 나은 세상이 있으려나? 여기가 지옥인데 거긴들 별다를까? 내가 하려고 하면, 모든 선도 악하다. 모든 의도 더럽고 추하다. 나의 의는 언제나 남을 들추어야 보인다. 그래서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참견을 잘하고 지적질이 능하다. 나의 선은 남의 시선이 있어야 돋보인다. 그러니 인정 안 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모두 다 죄다.
이를 통감할수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바울의 절규가 피를 끓게 한다. '나'에게는 환멸뿐이다. 이어서 바울은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곧 나는 내가 살면 나는 언제나 내 죄의 법을 섬기게 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나까지도 맡기신 것이다. 감사는 은혜의 결정체다. 내가 할 수 있는 입바른 소리가 아니다. 가령 아내와 나는 이제 그 비결을 알았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상한 애들’만 보내신다. 새로 온 6학년 아이는 자폐성이 있는 1학년 아이와 같다. 역으로 행동한다. 한 애가 지랄을 떨면 저 애는 엎어져 잔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것으로 밥벌이도 하고 산다. 그러려니 하고 주께 맡긴다. 뭘 굳이 하려 하지 않는다. 실은 주가 하신다. 앞서 온 1학년짜리 아이가 많이 달라졌다며 아내는 기뻐한다. 그 기쁨이 아내의 것이겠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지긋지긋한 몸뚱이를 가지고, 지랄맞은 한 날 한 날을 무던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내가? 아니, 나는 할 수 없다.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만 일어날 뿐인데, 사는 게 다들 지긋지긋한 까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도 내 자식이라, 돈도 내가 벌어야, 의도 선도 내가 이루고 구해야 하는 것이니 사는 게 지옥일 따름이다. 물론 나도 어림없다.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아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밖에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말씀 앞에 앉는다. 성경을 붙든다. 바울의 말도 그런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저도 죽겠는거라! 그러니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어쩌겠나?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있다면 굳이 쉰 소리하듯 이런 말씀에 의지하겠나?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우리를 단련하신다. 그것까지도 주는 내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그리 두심으로,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의 고약한 기질보다 백 배 천 배 더 사랑하고 신뢰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7:7).” 이는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