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미가 4:5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시편 38:17-18
오늘은 주를 의지하고 바랄 때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시편의 말씀을 오래 입에 머금는다. ‘물러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이국종의 <골든아워>를 읽다, 저의 치열한 외상외과 의료진의 현장을 그리고 있는 표현에 밑줄을 그었다.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어 명료해진 세상은 단순하고 순결하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설교하였던 ‘재림신앙’이 그런 게 아닐까?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물러설 자리가 없는, 죽을 날을 받아놓고 사는 것처럼, 더욱 명료해진 세상, 단순하고 순결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날의 보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나는 저의 처절한 현실이 축약된 문장에서 성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주어진 한 날의 삶으로 족한 것은 ‘지극히 큰 약속’을 붙든 자들만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오늘의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가지 소망을 갖는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누가 세례식 장면 동영상으로 보내왔다. 그 교회는 온 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의 형식을 그대로 행하였다. 그런데 덧붙여 비공개영상이라는 말에 나는 뜨악했다. 굳이 뭘 또 비공개로 할까? 의식의 의미가 강조될 때 위험성을 띈다. 복음은 감추어진 게 없다. 전에 어디 사는 친구도 마치 ‘비화밀교’처럼 병 고침의 은사를 행하는 데 있어, 교인들끼리도 서로 모르게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행한다는 데서 나는 기암을 했다. 베드로 사도는 그래서 우리의 ‘신성한 성품의 참여’를 위해 설교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너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며 공들이는 것은 위험하고, 이를 감추며 은밀하게 행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주의 일은 드러나되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하되 비밀스럽지 않다. 위험하다는 순화된 표현을 썼지만, 우리 안에는 이단적인 망상이 늘 농후하다. 과도한 의미부여가 우리 눈을 홀린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덕을 따라야 한다고 사도는 가르친다. 덕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삼가 조심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저는 믿음이 탁월하여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처럼 군다 해도, 그 행위로 누구에게 본이 되지 아니할까 하여 바울도 이를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롬 14:19-20).” ‘그러므로’ 덕에는 지식을 더해야 한다. 말씀을 바로 아는 데는 절제가 필요하고, 절제는 인내로 연마되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인내는 무던한 삶의 현장에서 연마된다. 이를 경건이라 여긴다. 걸음걸이 하나 말씨 하나가 일상의 것이다. 일상에는 언제나 내가 돌봐야 하는 형제가 있기 마련이다. 경건은 형제 우애로 다져진다. 서로를 위하는 것에 사랑을 더하라함은 우리의 여느 사랑이 아니라, 예수의 본체, 그 빛, 바로 그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즉 우리의 소망은 이 약속에 있고, 약속은 사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에 불과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을 해줄게.’ 하는 약속은 아직 말일 뿐이지 실재가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곧 이 땅에의 실현을 두고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주의 약속이다. 믿음이란 그렇듯 허상을 좇는 일과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 말도 안 되는 이 일을, 약속을 붙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상하게도 ‘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지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을 딛고 ‘예’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내가 애써 믿으려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친구와의 통화에서, 저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은혜를 은혜로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할 때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니 교회 다니는 게 ‘일’ 같고, 하루를 사는 일이 마치 ‘미션’ 같고, 그 고단한 현실은 마땅히 손에 쥔 것으로 판단하기 십상이니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저에게 입혀주신 은혜를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겠는데, 저는 그런 말에 풋, 하고 그저 웃음으로나 받을 뿐이다. 그러니 성경의 사람들이 이상한 것인가, 현실의 우리가 이상한 것인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이런 삶을 과연 은혜라고 여길 수 있겠나? 저에게 오늘의 나를 들어 말해주며, 나에게 이처럼 명료하고 단순하고 선명한 하루의 삶이 가능한 것은 나의 불안증 때문이고, 두려움이고 몸의 통증 때문이며, 한 날의 수고로도 몸에 부치는 힘겨움 덕분이라고 말했다. 물론 저는 풋, 하고 웃었지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올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한 것도 조롱과 채찍과 옥에 갇힘과 궁핍과 환난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외상외과 이국종에게 명료한 날은 ‘물러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였다.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수련회 기간에 어느 설교에서 들은 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우리는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이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그 말의 결의에 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그야말로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그런 날이 우리 성도의 삶이 아닐까?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아직 여지가 남은 사람들의 알량한 여유에서다. 조금의 재산이 있고, 아직 운신할 몸뚱이가 있고, 곁을 둘 수 있는 둔덕이 있으니, 나는 친구의 풋, 하고 웃는 웃음의 이유를 이해한다. 아직 물러설 자리가 있다고 여기는 한 은혜는 은혜를 다하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우리의 알량한 여유가 재림신앙을 물리고 해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지혜로라는 말씀이 막연할 뿐이다. 그러나 지혜는 계시로만 열리고 보인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오늘 이처럼 나에게 두시는 말씀에 대하여도 나는 그래서 긴장한다. 좋은 만큼 불안하다. 잃어버릴까 두렵고 행여 망칠까봐 두렵다.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듣다 나는 늘 과도하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까닭도 그저 남의 일로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의 사연을 내 이야기 같고,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알 길이 없어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생각은 내 안에 들어차 나를 긴장시키고, 이것이 병적이든 그저 기질 때문이든 나는 이제 그것으로 절박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국종의 치열한 의료 현장은 글로 다 말할 수 없고, 글로 표현되지 않는 치열함은 고스란히 나의 마음을 울렁거리게도 하였다. 우리는 한 시를 알 수 없고, 그러할 때 주의 영광을 느끼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그토록 모세의 간절함은 사람들을 건사할 능력이 없는 자신으로 더욱 절박하였다. 그러므로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 하시는데도 저는 기어이 살고자 하여 죽기를 각오하였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약속을 받고도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도 죽음으로 저희는 살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의 자랑은 이처럼 생뚱맞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자는 물러설 곳이 없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결국 날마다 죽는 자신을 자랑한다한은 죽음으로만이 사는 자들의 영광이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그 영광의 아버지의 영광을 알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나는 모처럼, 이국종의 치열한 삶의 기록을 읽으며 성도의 삶을 연상하였다. 하물며 이 땅에서 한 생명을 살리는 데 있어서 저처럼 처절하고, 처절함으로 명료한 날을 사는데 하물며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로서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사는 것이겠나?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말면 자조 섞인 말은 푸념이 되어 버려지고 만다. 이 잠깐 앉아 묵상글을 쓰는 동안 나는 허리가 아파서 몸을 여러 번 비틀고, 의자 끝에 궁둥이를 간신히 걸치고 앉았다. 금세 훅, 하고 이는 불안은 서둘러 안정제를 삼켜야 한다. 내가 내 몸으로 사는 일이 힘에 겨울 때, 그것으로도 나는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 살 수가 없어 사는 이 절박함을 나는 사랑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그래서 나는 더욱 절실히 긍휼을 바란다. 이는 마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4:2).” 오늘 아침에 주시는 말씀 또한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미 4:5).” 하는 데서 나는 안도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저들, 믿음의 사람들이 앞서 걸은 길이다. 그러니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는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하는 고백이 순전히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비록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이로 인하여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시 38:17-18).” 곧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6-7).” 그리고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8).” 그래서? 그래서 나는 더욱 주의 이름으로밖에 설 자리가 없어 명료하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9).”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