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5:2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미가는 히스기야 왕 때 불의를 꾸짖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선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은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말씀은 선언이고 선포이다(미 5:2). 다니엘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이를 보았고, 다만 이를 선포하였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단 7:9).” 하나님의 시간은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에부터 시간 이후에도 영존하시다. 비록 메시야는 작고 천한 자리에서 나셨지만, 그 일은 첫째,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인 것을 미가는 전한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미 5:3-4).” 둘째, 남은 자가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목축하고 거주한다. 곧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5).” 그리고 셋째, 악을 물리치시고 선을 이루신다.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6).”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이제 12월 한 달을 남겨두고 11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에 앉아, 문득 성탄을 묵상하게 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한 날 하루가 더해져서 한 해가 흘러가고, 어느덧 내가 살아온 날들도 까마득한 날 수를 거느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가끔씩 막연하게도 두려움이 있었고, 이는 죽음에 대한 것을 넘어 그러다 주를 모른다, 외면하고 배교할 것 같아 몸서리치고는 하였다. 어린 게 뭘 안다고, 나는 중1때 세례를 받으며 그렇게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같은 게 용서를 받고 구원을 입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나를 어째서 주는 사랑하시는가, 난 알 수 없었다. 이는 50여 년이 흘러 오늘에도 같은 맥락의 은혜를 가지고 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하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새찬송가 310장, 전문
며칠째 귓가를 맴돌고 허밍으로 따라 부르던 찬송을 옮겨 적으려니 새삼 모두가 나의 고백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 땅의 삶으로 전부라면 한 해 한 해 날이 더하는 것에 아쉬움도 남고 서러움도 남아 더욱 더 악착같이 살날을 살아가는 게 마땅하겠으나, 우리의 가는 길은 ‘본향을 찾는 자임이라.’ 사람이 아무리 크고 귀하다 하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 그렇게 인정하신 요한인데 세례요한은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였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3).” 묵상하면 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허망한 일인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산다함은, 그 소리는 흩어져 바람에 사라지고 모래 위에 뿌려질 따름이라 손에 쥘 게 없는 인생이다. 그러나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었다. 이를 마다하려니 오히려 내 안에 근심이 죽 끓듯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하나 바로 살겠다고 입을 다물고 있을 일이 아닌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그러나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사명을 일깨운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 결국에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5).” 주께 아뢰고 고하여 입을 연다. 요한과 같이 우리는 모두 불을 켜서 등불을 비추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 5:35-36).” 나를 위한 나의 빛이 아니라 주의 길을 평탄하게 하고 비추이는 빛이라. 이를 받지 않으면 오히려 내 속이 타는 것 같고, 내 안의 근심이 나를 들들볶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그 어려움을 알고 계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이처럼 한 해 마지막 달을 앞두고 맞이하는 주일 날 아침, 인생이란 그 자체로는 덧없음을 일깨우신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그저 다들 자기 살 궁리에 자기 의를 더해서 자신의 노력으로 어찌 좀 감당할 수 있을 줄 아는 동안에, 사는 게 사느라 고역이라.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듣다 또는 저의 어쩔 수 없는 괴로움으로 같이 탄식하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날 알 수 없도다.’ 하는 찬송이 나온다. 어릴 때도 그처럼 부끄러워 세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울기만 하였더니, 먼 길을 돌아 방황하다 기어이 붙들려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나는 또 울고 고개 숙여 가슴이 벅찼다. 그때 나를 붙드시던 한 구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내가 할 염려가 아닌 것을 두고 근심하는 일보다 불충은 없다. 살면서 드는 마음이 빌립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그러자 예수님은 답답하신 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오늘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던가?
예수를 앞에 두고도 ‘~여기 계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푸념이나 늘어지기 일쑤고.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또한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우리는 현실을 보고 예수는 이상을 말씀하신다. 말씀은 예언이다. 미가서의 증거도, 이사야의 선언도, 예언이다. 예언이란 이루어질 약속이고 약속이란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붙드는 일이다. 믿음은 그러하여서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또 말씀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를 붙드어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 나는 이제 ‘광야에서 외치치는 자의 소리’로 족한 사람이어야 한다. 아무도 듣지 않고 그저 흩어져 바람에 사라지고 모래 에 흩어져버릴 것 같으나, 그 영광의 광채를 앞에서 보는 자의 덕목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코로나가 재 확산 되고 ‘코로나 블루’라 해서 많은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호소하고 울분을 가지고 남을 탓해대며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때에,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4:4).” 그렇게 사람들은 혼미하나, 우리는 똑똑히 보리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5).” 곧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이와 같은 말씀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붙들 것인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6:6).” 이에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하는 고백을 내 것으로 삼아, 나의 남은 날은 온전히 주만 바라며 주께만 나의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기를.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9).”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