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시편 40:7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고 전하는 ‘정의와 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이를 축약한 것이 십계명이다. 이를 사랑할수록 그 앞에서 겸손하여져 오직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럼 왜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계명과 율법을 우리에게 더하신 걸까? 하고 물을 때에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정의(1-4계명)와 인자(5-10계명)’를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도 이를 어쩌실 수 없는 당신의 성품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기록하시는 분’이시다. 나에 대한 모든 내용도 생명책에 기록하셨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이처럼 말씀이 나를 이끄시는 새벽 시간,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된다. 누구의 고백처럼 ‘그저 무력하게 나는 은혜를 구하네.’ 하고 주 앞에 앉는다. 무력함을 느끼는 것은 은혜의 문고리를 여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동안에는 알 수 없던 손잡이였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7).”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시인의 노래가 내 노래가 되었다. 코로나 재 확산으로 인해 주일 날 장모와 형님이 오실까 했는데, 이제 사회생활을 하는 조카애까지 같이 왔다. 장모는 뵐 때마다 운신이 더 어려운 육신을 이끌고 남은 생을 다하고 계셨고 손위처남은 열심을 다해 말씀을 사모하였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모셨다. 왁자하게 떠들며 지난 이야기를 나눌 때, 아내가 즐거운지 친정오빠와 친정엄마 앞에서 수다를 떨었다. 모든 게 까마득한 세월처럼 여겨져 나는 오늘의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주의 종이 되어 저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된 것도 희한하지만 우상의 손길에서 거두어 주의 선상에 올리신 저들의 내력도 기가 막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 6:9).” 그러한 때에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4).” 주께서 이루신 놀라운 기적을 나는 전하고 전하여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누구는 이와 같은 행적을 우연이라 여겨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는 또 이와 같은 일로 주의 은혜가 사무침을 느낀다.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르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이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은혜는 내가 누구보다 더 나아서 얻은 게 아님을 이제는 잘 안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여 에베소교회에 전하였고, 이 말씀은 종교개혁을 이루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그 크신 사랑의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를 알게 하신 이에 따른 아주 특별한 은혜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나는 이제 손위처남네 가정을 위해 축복하여 저희 가정을 통해 아직도 안 믿는 일가친척들에게 주의 살아계심이 증거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 내가 어찌 수고하여 얻은 게 아니었음을. 곧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그러니까 우리가 인연이 되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때만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내가 좋을 대로 사랑을 하고 결혼으로 맺어졌으나, 주께서 임의로 애굽에서 주의 백성을 이끌어내신 것처럼 저들과 나를 오늘 이처럼 주 앞에 세우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 무엇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는지를 이제는 안다. 주께서 부르시고 돌이켜 세우신 바, 그 기록이 주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 이를 믿지 못함은 우리의 자기 의지이고 이를 믿음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누구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누구에게는 은혜 중에 은혜일 따름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2-13).”
온전히 이 모든 게 내 이야기, 나에 대한 우리들의 기록이 아닌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고로 늦게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 그러니 나 또한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그저 무력하게 은혜를 구하네.’ 하는 것이다. 전에는 뭐라 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이 좋지 않던 이야기들이 나의 치부 같더니 이제는 내게 아무 주장도 할 수 없는 은혜의 증거가 되었다. 은혜란 그처럼 새로운 관점과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보이시는 것이다. 욱, 하고 치밀던 억울함이나 분함도 이제는 내게 은혜가 감추어져 드러나는 증거이다. 자존심은 사라져서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하시던 말씀 앞에 부복하며, '그저 무력하게 은혜를 구하네' 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말씀이 곧 모두 나의 것이고 나를 향하신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저절로 감격이 넘쳐나서 다만 나는 송구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리할 수 있게 하신 이에게 무한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며. 우상을 숭배하고 귀신들의 넋을 기리는 일에 사로잡혔던 저희에게 주를 나의 아버지라 고백하게 하시고, 오늘에 이르러 더욱 말씀을 사모하며 주를 바라게 하셨으니, 나는 친정식구들과 식탁을 같이 나누며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새삼 생소한 감사를 느꼈다. 이와 같은 감사는 감개무량하다 하는 것이 아닐까?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심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그리니 내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는지, 난 알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하등에 쓸모없는 나를 오늘에 두심으로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감격할 수 있게 하시는지, 난 알 수 없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시는 주님, 늘 도와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하는 찬송가처럼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144:3).” 하시는 말씀의 고백처럼 이제 우리는 모두 하나라. 오직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보다 이 말씀을 붙들고, 다른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분명하여졌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그것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오늘 시인의 고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이러한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심을 감사하고, 우리가 이처럼 다함께 주를 바랄 수 있음은 복이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 돌아보면 주의 은혜를 셀 수도 없이 많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5).” 다만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