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전봉석 2020. 12. 4. 06:08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훔 3:2-3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44:17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서 하나님은 종종 나를 잊으시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시 44:23).” 죄가 만연한 니느웨와 같은 사회에서 살면서, 우리는 어찌해도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가 없다(나 3:1-7). 이게 맞나? 이래도 되나? 이 길이 주의 길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2-3).” 온갖 일상의 것들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오히려 무고한 자가 끌려가 피를 흘린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계 18:24).” 진리가 혼미하고 포악과 탈취와 악행만 만연하다.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5).” 영육간에는 음행으로 여러 나라가 미혹을 당한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3).” 모든 게 엉망진창 제멋대로인 것 같다.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23).”

 

니느웨는 저들이 자랑하던 자연과 완벽할 것 같은 성벽의 요새가 무너졌다. 저들의 용맹이 수치와 두려움으로 사라졌다. 모든 자부하던 것들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시간으로 들어갔다(나 3:8-19). 오늘 본문을 읽으며 문득 나의 일상은 어떠한가?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현실은 다른가? 다들 그러고 산다. 사느라 정신없이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우리도 나름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느라 산다고 사는 데, 애쓰며 사는 일이 이게 맞나? 싶은 것이다. 이는 수천 년 전에 멸망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매시대마다 모든 역사에서 자행되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얼까? 그것은 바로 <확신>이다. 저들과 다른, 엄연히 다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한다.

 

누구와 통화하고, 덩달아 마음이 어려워서 책상에 앉았다. 창가에 나란히 올려둔 고무나무와 군자란과 국화, 크리스마스나무가 보기 좋았다. 그 중에 시들어가는 군자란의 누런 잎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럴 때 어김없이 하나님은 우연처럼 나를 말씀으로 끌어다 앉히신다. 그렇게 읽게 된 말씀이,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앗! 그렇지. 우리에게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곧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짧은 구절의 말씀에 성경 66권의 내용이 모두 축약되어 있다.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므로 확신이었다. 하루를 사는 일상에서, 교회를 이루어가는 일에서, 주어진 모든 날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확신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늘 되풀이 되는 일상의 '홀림과 끌림'으로 우리는 시달린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로 어렵고, 누구 때문에 상처 받고, 또 터지고 마는 어떤 일들 가운데서 우리는 속수무책 휘휙, 윙윙, 정신을 아주 쏙 빼놓는 이 사악한 날들을 우리 힘으로 살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엄연히 우리는 ‘영접하는 자’이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살 수 없는 자들과 다른 게 있어야 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 말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투루 문자적으로나 읽고 말면 늘 돌아오는 것은 회의와 감정의 기복뿐이다. 좋을 때는 은혜 안에 있는가 싶다, 어렵고 힘들면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이 갈팡질팡, 원론적인 의문점들로 견딜 수가 없다. 고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연한 사실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앙'이다. 확신과 의지는 동의어다. 같은 동일선상에 놓인다. 누구를 신뢰하지 않는데 저를 의지하겠나? 하다못해 지팡이를 짚을 때도 내 힘을 실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확신이 없는데 저것을 짚을 수 있겠나?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믿는다'는 강도와 세기가 같을 때 균형이 잡힌다.

 

어느 선생의 말처럼 나는 한동안 달라진 나를 두고 현실 도피로 여겼었다. 갑자기 모든 게 빨려 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도 있었다. 잘 통하고, 누구보다 의지하며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들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기껏 잘 나오던 아이들이 글방을 그만두었고, 같이 시작했던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갔다. 목사 안수를 기점으로 '요이 땅!' 하고 모두 기다렸다는 듯. 주일이면 아내와 둘이 교회를 지키기 일쑤였다. 그러다 한 아이라도 예배에 나오면 다행이었다. 평일에 아무도 오지 않는 글방에서 나는 혼자서 시들어가는 군자란처럼 누렇게 맹숭맹숭했었다. 이 길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굳건한 인식이 아니면 한 발짝도 못 간다. 다른 길은 없다!

 

가령 아내가 하는 공부방에서의 수입으로 밥벌이를 해야 할 때, 그 지겹기만 했던 시절은 가히 지옥 같았다. 그럴 때면 늘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대답 없는 질문이었다. 이 길이 맞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정말 이런 것일까? 그러다 문득, 이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 앞에 오열했다. 내가 하려고 하면 그러는 내내 시달림을 당해야 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8).”

 

사도들도 이 복음의 진리를 알기까지 누구는 옛 생활로 돌아가려 했고, 누구는 반년이 넘도록 옥에 갇혀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 하나,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앞서 늘 주와 함께 동행하였던 사도 또한 엉뚱한 의문에 시달렸나보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 그러니 실제 저들은 같이 하던 자들인데도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던 이 길 위에서, 오늘 우리의 확신은 무슨 근거로 가능할까?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 우리의 뜻으로 된 게 아니라는 사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하지 못함은 사는 일을 자꾸 육신의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성령의 일로 오늘을 받지 못하면, 결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안 믿는 자와 구별될 게 없다.

 

주의 길을 간다 하면서 날마다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면서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니 마음은 팍팍하고 믿음은 푸석거리듯 감동이 없다. 이에 바울은 천명하기를, 이미 우리는 우리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데 있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내가 나로 살려고 하면 사는 게 고역이라. 어느 특정인의 고백이 아니다.

 

아내는 요즘 달라졌다. '내 일이 제일 좋아! 내 일터가 제일 근사한 거 같아!' 하면서 아내는 자주 수선을 떨고 발랄하다. 아내의 그런 모습은 때로 경이롭다. 오는 애들이라면 일부러 그러시는 것처럼 자폐성성격장애가 있거나, 분노조절장애가 있거나, 그 뒤에는 어김없이 안 믿는 가정의 이혼과 반목의 일상이 도사리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잡자기 나자빠져 떼쓰고 지랄을 떨며 정신을 쏙 빼놓는 아이, 그런 사실을 아이엄마도 아니까 저이도 우리가 못하겠다 할까봐 전전긍긍이라. 여러 학원에서 그러다 더는 다닐 데가 없어 여기까지 밀려온 애들이 반이다. 한 애는 자꾸 똥을 싸고, 화장실에서 휴지로 난장판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저런 사건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도 아내는 저녁마다 가정예배 때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마음은 이제 아내의 것이 아니라는 데 우리는 다들 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일터가 제일 좋다고 하니! 코딱지만 한 아파트 거실에서 왁자지껄 엉겨 한나절 아이들과 씨름하는 일은 상상 그 이상의 아수라장이다!

 

그럼에도 감사의 콧노래가 나오는데 이것이 자의적인 것일까? 오직 이 일을 하시는 이가 따로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 확신한다. 요한도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는 말씀에서, ‘되는’ 권세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권세다. 우리가 취득하는 자격이 아니다. 자녀가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닮는 것이다. ‘되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지 내가 애써, 누가 억지로 그리 된 게 아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썼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심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 즉 이 일은 우리가 원해서 하게 된 게 아니다. 삶이 그러하고 주의 사역이 다르지 않다.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일이다. 우리로 오늘, 여기, 나로, 살게 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그러니 아내 입에서의 감사나 나의 날들이 언제부턴가 체념이 아니라 순응으로, 내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여기는 것은 억지가 아닌 확신이다. 어쩌다 살게 된 인생은 없다! 우리는 모르는 동안에, ‘되었다.’ 즉 ‘신령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에 따른 엄연한 사실은 우리 안에 두시는 '확신'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확신. 당연히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권세라는 확신.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아니면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살겠나? 사나 죽으나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힘으로 산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니면 이 혼란한 '니느웨'에서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나 3:2-3).” 우리는 무슨 힘으로 살까? 이제 주께 고한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4:17).” 곧 우리 가는 길을 주가 아시나니, 번번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주를 의지하고 간다. 주만 따라 간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 그러니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 오직 주밖에 없음을.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