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시편 47:6
역설적이게도 찬송이 가능해지는 때는 역경으로 인함이었다. 주를 두려워할 수 있음은 그의 권능도 알기 때문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시 47:2).” 오늘 시편의 외침이 크게 울릴 때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도 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그것은 두려움에 의한 억지가 아니라, 경이로움에 따른 경탄의 소리였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16).”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백 명씩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생활 곳곳에 ‘조용한 전파’로 흘러 다닌다. 아이엄마는 아이를 교회로 보내지 않았고 나는 강제할 수 없어 무력하였다. 그야말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내 입술이 떨렸도다.’ 그렇다고 생활을 중단할 수 없고, 사는 것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어서 마치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하는 선지자의 곡성을 듣는 듯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러할 때의 이와 같은 고백이라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하고 저마다 살 궁리에 젖어 강퍅한 생활은 거듭되는데. 몸은 성하지 못하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우리로 주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은 과정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 저가 나를 대신하였다는 확신. 그리하여 주어지는 자유의 선언이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이를 두고 바울은 전한 것일까?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이를 위해 앞서서 행하셔야 했던 것은 하나님과 나의 화목이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다. 내가 어찌 더하여 얻은 결과가 아니다.
삶이 아무리 어떠하고,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 내가 이처럼 주를 바라고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주의 긍휼하심이었다. 내가 어찌 살았나? 돌아보면 주의 은총은 더욱 뚜렷하여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오늘 나에게 맡기신 사명은 그것이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제 ‘사신이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권면하셨던 것 같이 나도 누구의 사연에 그리하여 저의 아픔에 동참하는 자리에 동행으로 서는 일이다. 종종 병원에서도 그러고 곁에 있는 사람들도 우려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어 그렇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어제 그제는 평소보다 신경안정제를 더 자주 찾아야 했다. 그러니 내 의지와 실제의 나는 얼마나 큰 괴리감이 드는지. 그러나 이 또한 주의 것이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주님은 나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십자가의 보혈로 소멸하셨다.
주의 일이란, 바울의 진술처럼 알면서도 두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고난을 자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는 내가 살고자 하여 얻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를 ‘자기 십자가’로 상정하신 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단지 먹고 사는 문제, 원론적인 문제에서부터 벗어나 나만 억울하게 느껴지는 부당한 삶의 질곡을 두고 말씀을 되새김이 필요하다. 곧 안 믿는 자들은 이를 팔자소관으로 돌리지만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이를 주의 강권하시는 은혜로 받는다. 그렇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이는 꾸역꾸역 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것만으로 죽지 못해 사는 일로 여김이 아니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그리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나를 위하는 나의 마음이 나의 가장 큰 걸림이었다.
나를 부인하는 일, 늘 내 안에 엄습하는 두려움과 갈등으로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는 일이다. 나는 나를 부정함으로 주를 바랄 수 있고, 주는 주를 부정하지 않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사람으로 오셨고, 말씀으로 여전히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신다는 약속,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의 슬픔이 크게 느껴지고,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며, 아이엄마의 스스로 지고가는 삶의 무게에 덩달아서 마음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산다. 옥에 갇히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면서도, 산 채로 불 태워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이와 같은 감사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그렇다고 이들이 손에 쥔 게 있었던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나는 늘 이 말씀 앞에서 오싹한 감동을 받는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으며 사는 삶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당하고, 깨지고, 무너지고, 으스러지는 고단한 날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저들이 붙든 것은 바로 저 소망이었다. 약속이었다. 이를 변개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이를 강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환난으로 우리는 싫어도 인내를 배운다. 인내는 단단하게 연마되는 은혜이고, 연단의 은혜는 비로소 소망을 굳게 붙들 수 있는 힘을 더한다. 이 힘은 주의 권능이다. 그리하여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나의 이야기로 다시 읽으면 ‘내가 여전히 죄를 즐기며 그 안에서 위로를 삼으려 할 때, 그리스도는 기약대로 경건하지 않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 저의 죽으심은 내가 돌이킬 것을 아신 것이고, 저의 앎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 사랑의 확신이셨다. 기약이란 때를 정한 약속으로, 때가 차매 나를 돌이키셨고 굳어진 나의 죄 됨을 없이 하게 하시려고 강권하심이 동원되었다. 오늘도 나를 다시 붙드시는 것은 나의 의연함이 아니라 연약함이다. 나는 나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오늘 시인도 이를 잘 아는 바,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시 47:6).” 우리의 찬송이 정당함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인생이란,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그것으로 나는 고통스러워하다 주의 이름을 되뇌일 때,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합 3:14).” 주가 나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이를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15).” 이처럼 한 날 한 날의 삶이 때론 버겁고 힘에 겨워 쓰러질 것 같다 해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 이와 같은 고백은 이제 내 품으로 온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나는 이를 아멘으로 받기 원한다. 그리하여서,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시 47:1-2,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