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학개 1:7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편 51:4
죄는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말씀은 이를 조명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7).” 그러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된다.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나의 죄를 해결하고 담당하실 이는 주님뿐이시다. 곧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럼에도 항상 나의 요구가 먼저인 까닭은 주가 베푸신 은혜를 자꾸 잊는 것이다. 정한 마음을 잃고 정직한 영을 상실할 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그리하여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 이처럼 가만히 말씀을 머금으며 고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천하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이처럼 몸부림친다. 이는 자신의 욕망이었고 이를 은폐하려 했던 행위들이 모두 죄에 죄를 더한 셈이 되었다. 그의 남편 우리아를 회유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이내 저를 전장 깊숙이 내보내 죽게 하였다 그리고 그래도 되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밧세바를 아내로 들였다. 그렇게 그는 1년여 가까이 이를 무마하고 잊고 지내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로 저에게 찾아오시자, 절규한다. 이는 우리 일상의 소소한 죄의 얼룩과 다를 게 없다. 이를 오늘 학개 선지자의 목소리로도 들려주신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 1:8).” 그리하는 것이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일 텐데,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9).” 그처럼 자신을 돌보는 데는 빠른데 주의 일을 돌아보는 데는 더디다. 그 일상의 틈은 헐거워져서 온갖 질고의 잡음이 끼어든다. 사는 데 온통 시끄러운 일들뿐이다. 누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누구는 무슨 일로 괴로워하다 심지어 교회를 떠났다.
그럴 때 누구는 부모의 교육을 탓하고 오늘의 환경을 핑계댄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 가령 다윗 다음으로 역대왕들 가운데 의롭다고 인정받는 이가 히스기야 왕이다. 저는 분열된 남쪽 유다나라의 열세 번째 왕이었다. 앞서 그의 부친 아하스는 악한 왕으로 무엇보다 주의 성전을 욕보여서 이방신들을 안에 들이고 성전의 기물로 저들에게 제사하였다. 곳곳에는 산당을 세웠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히스기야가 뒤를 이어 나이 이십오 세에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성전을 정화하고 재건하였다. 산당을 헐고 우상숭배를 타파하였다. 이는 어쩌면 그의 어머니 아비야의 신앙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비야는 스가랴 제사장의 딸이다. 그러한 히스기야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대하 32:1).” 그런데 앞서 덧붙은 언급이 눈길을 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전쟁이 터졌다. 이 상황은 저의 탓이 아니다. 하나님께 억울할 수도 있겠다. ‘충성된 일을 한 후에’ 고작 돌아온 것이 환난이라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왕왕 있는 일이다. 함부로 살다 그리 된 것이면 이해가 되지만, 충성을 다한 후에 맞이하는 일로 고통은 좀 납득이 안 된다.
그때 히스기야의 처신은 놀랍다. 당연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믿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3-5). 성곽을 증축하였고 물의 근원을 끊었고 그 물을 끌어다 전쟁에 대비하여 저장하였다. 이것은 주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는 증거이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7-8).”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된 신앙의 자세이다. C. S. 루이스는 이를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이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분이 바뀔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술이다.” 여기서 저는 기술이란 표현을 썼다. 이는 다분히 함축적이다. 기술은 오랜 기간의 훈련과 단련으로 연마된다. 어쩌다 어느 순간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니다. 모든 기술은 연마하는 시간과 비례하는 것으로 도제의 생활을 요구한다. 그처럼 믿음과 신앙은 구분되고, 신앙은 오랜 도제의 생활로 연마와 수련의 기간을 의미한다.
성경은 종종 믿음과 신앙을 별개로 놓고 말씀하신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무슨 말인가 하면 믿음이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신앙이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어려운 일이 터져봐야 안다. 그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이 말씀의 의미는 참으로 깊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지만 도제와 같이 신앙생활이 따르지 않으면 허상일 수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믿음의 확신으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신앙생활은 엉터리로 하면서 자신들은 믿는 사람입네, 하는 그런 믿음을 자부하기도 쉽다. 히스기야가 남다른 것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선지자 이사야에게도 함께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왕하 19:20).” 그렇듯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은 평소에 연마된 은혜의 기술이다. 좋고 평탄할 때야 누군들 의연하지 못하겠나?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충성 후에’ 어려움으로 다지신다. 그때마다 말씀으로 소환된다. 그럴 때 되새기며 이를 붙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오늘 말씀도 이를 조명하고 있다. 다들 자기 살 궁리에 여념이 없을 때,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돌아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제든 우리에게 닥치는 ‘앗수르의 산헤립’으로 전전긍긍할 때, 묵묵히 주를 바라며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연마한 은혜의 기술로 이를 이겨낼 수 있다. 가령 어제 아침에 아내는 전전주에 받은 종합검진에서 간에 이상 소견이 있다고 하여, 굶고 병원에 갔다. 피검사와 초음파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 시각에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며, 같이 쿠폰으로 받은 무슨 커피점에 가서 팬케이크를 먹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 아내에게 가만히 기다리라 있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로 그, 간절함으로 기도하고 말씀도 보라고 일렀다. ‘그 기회’가 좋은 순간이다. 물론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니까, 같이 밖에 나가 커피라도 한 잔 했으면 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그럴까 하다 그것보다 혼자 가만히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다시 또 주의 은혜는 모든 결과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진단이 나왔다. 나는 그때에야 병원에 가서 아내를 데리고 같이 커피와 팬케이크를 사고, 다음 주에 있을 운전면허 주행시험 코스를 서너 번 돌아주며 그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준비해야 하는 것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도 필요하다. 그때에는 평소 숙달된 은혜의 기술로 살아야 한다. 학창시절에 읽은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생각났다. 평소 책을 안 읽는 사람이 정년 퇴직을 하고 나서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겠다며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열심히 사서 모으는 일은 우습다. 누구는 책장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고 손수 목공 일을 하듯 책상과 서재를 꾸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것도 우습다. 이는 모두 평소의 연마해야 하는 기술의 영역이다. 이처럼 늙음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병듦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죽음에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무엇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죽기 전까지 늙음과 병듦의 고통은 또 어찌 인내할 것인가? 언제 우리에게 죽음의 앗수르가 침공할지 모른다. 나는 믿음이 좋으니까 언제든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는 믿음보다 허상을 좇는 일이다. 믿음은 힘써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 힘쓰라고 하셨다.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리 쉽지가 않다. 호기롭게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해도 모두가 좁은 길로 끝까지 참고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다들 평탄한 길로 통하는 듯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일부러 좁은 문, 좁은 길로 가겠나? 광신자도 아니고! 그러니 평안을 빌며 종교도 선택 한다!
누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심도 있게 다루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저 그렇게 돼서, 어쩌다 그리 행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수동적인 걸음의 길이 신앙이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다른 말로 하면 쉽지 않다는 소리다. 믿기는 쉬우나 신앙생활이 그리 헐렁하고 쉬운가? 자신은 늘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가?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바리새인과 같이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졌거나 고등종교? 하등종교? 여느 종교 중 하나로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이는 익숙해질 수 없는 길이고 문이다. 자기가 힘쓰고 수고한다고 해서 자부할 수 없는 길이다. 내가 날마다 이 아침이면 말씀으로 씨름하는 까닭은 해도 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나의 연약함으로는 도무지 나를 이겨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서기 무섭게 또 다시 나를 엄습하는 불안과 근심과 우울의 불신앙적인 늪은 깊고도 어둡기만 하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도, 교회에서 하루 종일 지내면서도, 심지어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나는 수시로 나에게 진다. 나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말씀으로 붙들리기를 원한다. 이내 이 길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은혜는 연단의 정도에 따른 소망으로, 이를 누리고 바라는 정도가 전혀 다르다. 넘치도록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누구는 이를 감사함으로 받을 줄 모르고 번번이 쏟아버리기 일쑤다. 자기 안에 담을 그릇이 없다. 책장에 책이 가득하지만 진득하니 앉아 읽을 수 있는 기술이 없다. 성경은 가장 고급스런 주석성경으로 들고 다니지만 일주일 내내 펼칠 줄을 모른다. 기술이 연마되지 않은 은혜는,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채갈뿐이다. 나는 오늘 다윗의 기도를 백 번 이해하고, 이를 연마하려 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그러려면 나의 관심은 온통 주께 향해야 하고, 그 즐거움의 기준은 주의 것이어야 한다. 자원하는 심령은 객기가 아니다. 호기롭게 장담할 수 있는 믿음이란 없다. 신앙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뒤늦게 누가 아차, 싶어서 좁은 문을 들어가려 해도 갈 수가 없고, 좁은 길로 가려 해도 갈 수가 없다. 평소 우리의 일상, 신앙생활은 곧 우리의 믿음의 기술을 연마하는 수련장이다. 곧 누구나 늙음이 오고 병듦이 오고 죽음이 온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두렵고 떨림을 커피 한 잔으로 희석하려 해선 안 된다. 죽기 전에 가보고 먹어보고 해보고, 그러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 기회를 간절함의 기술을 연마하는 데 쓰는 것이 유익하다. 가만히 주께 향하는, 좀 가만히 있어 주를 바라는, 기다림은 익혀야 하는 최고의 고난이도 훈련이다. 모든 인생은 혼자 오고 혼자 간다. 고통도 슬픔도 누가 덜어주는 일이 아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오롯이 하나님 앞에 나 혼자만 간신히 지나갈 있는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이다. 나는 ‘죽음의 기술’과 ‘늙음의 기술’과 ‘병듦의 기술’을 오늘 시편의 기도에서 '은혜의 기술'로 배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먼저는 나의 근본을 바로 알고, 다음은 주께 온전한 가르침을 구한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그리고 이 모든 슬픔의 강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그리하였을 때 비로서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그렇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곧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이러한 기도와 의지함의 기술은 평소 우리의 일상에서 숱하게 치르는 ‘앗수르 산헤립의 공격’에서였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14).” 그래서 이제는 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나는 어떠하든지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없음으로 주의 영이 늘 나와 함께 하심으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