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개 2:5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8
학개의 증거는 세 가지로 축약된다. 성전건축을 촉구하고 주의 백성이 왜 수확-은혜가 없는가를 알리고, 이방나라들은 멸망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건재할 것임을 전한다. 이를 상기시키며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오늘 시편의 말씀이 이어서 묵상의 깊이를 더하신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곧 우리는 이를 아는 사람들이고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시다. 그렇게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 곧 우리의 이런저런 모양의 사건과 상황들이 우리 삶을 에워싼다 해도, 그래서 염려가 또한 우리를 엄습하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진동으로 주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심을 알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8).”
곧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이와 같이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다. 누구와 통화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상이 주의 문자이고 음성이라고 말해주었다. 우연처럼 무슨 책을 읽었고 누구와 만났으며 어떤 일이 터지고 그 일에 어떻게 되었고, 하는 모든 데서 말씀으로 우리는 주의 뜻을 헤아리는 사람들이다. 이는 우리의 직관이나 통달이 아니다. 우리의 우여곡절, 죄의 결과들이 오히려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을 선명하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죄를 더하겠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물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크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이는 자신의 몰염치했던 삶과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럼에도 주께서 긍휼하심으로 나와 함께 하신 데 따른 감사로써의 고백이다. 그러니 죄를 더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 더는 지나온 나의 나를 돌아보지 않고 싶다.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때의 일을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안다. ‘주께만 죄를 지었다.’ 하는 어제 다윗의 시편처럼,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2).” 이를 아는 것이 오늘에 이르러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그 은총을 아는 것이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 여전히 그 죄는 내 앞에 웅크리고 시시각각 때를 보는 것 같다. 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4).” 오늘 시편을 이어서 볼 때도, 에돔 사람 도엑이 다윗의 은신처로 선지자 아비멜렉의 거처를 알리고, 사울로 하여금 그곳에 있는 수련하는 선지생도 수십 명을 모조리 학살하게 끔직한 사건을 두고 지은 시이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53:1).” 스스로의 판단과 납득을 기준으로 삼을 때, 그것으로 ‘주의 일’이라 여겨 서슴지 않는 사람들의 최후는 끔찍하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들의 자부심이 행여 나의 긍지가 되지는 않을까? 내 안에 도엑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두렵다. 그때에 주님은 저들에게 이르신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더는 기회가 없이 쫓겨나는 때는 늦었다.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도 저들과 같은 자긍함과 도엑과 같은 영웅심이 들어앉아 있음을 목격할 때 오금이 저린다. 성령은 그렇게 우리 영을 비추신다. 주께 고하고 주를 바라는 게 달리지는 이유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증거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일상에서 받는 유혹으로 꾸며내려는 마음이 있다. 스스로의 겸손과 나름의 열심을 숭배한다. 그러니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골 2:18).” 저는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는 사람이다. 이는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하시는 우리의 성장 원리를 알지 못한다(19). 이것은 유익이 없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성경은 묻는다.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설마, 하는 안이함과 아차, 하는 불감증이 오늘의 우리 영혼을 나태하게 한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0-23)."
보면 다들 참 열심히들 산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죽어라 하고 사느라 산다. 나는 종종 저들의 열심이 저들을 삼키는 것을 본다. 집안 여기저기에 십자가를 걸고,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몇 장씩 보고, 의무적으로 몇 시간씩 기도를 하고, 또 뭘 해야하지? 하면서 주의 일에 참여하고, 사순절을 지키려고, 스스로를 경건하게 하려 하면서. 실제 사순절은 로마가톨릭의 도안한 절기이며, 몇 시간씩, 어디를 향해, 하루 몇 번 하는 식의 규례는 오늘도 많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행위로서의 신앙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성령으로 산다는 것인데 이처럼 다수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소진되는 삶이 아니다. 그래서 ‘성령의 자유보다 율법의 억제와 규제를 따라 사는 것이 더 쉽다.’ 그 자유는 종종 우리를 방종하게 하거나 더 많은 제약을 덧씌워 억압하기도 한다. 염려가 더해져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불안은 불평을 갖게도 한다. 성령은 그러한 우리의 갈등과 분열을 조성하심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게 하신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이 땅에 적을 두고 사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임시적일 뿐이다. 가족이라 해서 다가 아니고, 자식이라 해서 무조건 목숨보다 귀한 게 아니며, 부모라 해서 하나님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는 여러 번 쓰고 되뇌며 그리하여 오히려 오늘의 임시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지, 영구히 이를 바라느라 기를 쓰는 게 아님을 알았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게 무얼까? 나의 자의적인 판단과 기준, 내가 이성적으로 납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는 성령의 일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 이것이 본질이다. 오늘의 사는 목적이 다른 것이다. 그리니까 오늘의 모든 여건과 상황은 과정일 뿐이지 우리의 근본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일이다.’ 곧 특정한 방식의 삶과 규례로 나를 억압하는 일이 아니고, 구원의 확신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자유는 종종 막막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주의 영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는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곧 내 안에 어떤 소원을 두신다 것. 내가 왜 저이를 생각하고, 누구의 아픔을 자꾸 기억하는지! 내가 왜 저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저에게 나아가는지! 때로는 알 수 없으나 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오, 주의 사랑이 날
내버려주지 않네
-조지 매터슨
그 사랑, 그 은혜로 나는 이끌려서 살게 하신다. 더는 세상의 매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시간도 마음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 남들처럼 누리고 남들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저것들이 더는 나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안다. 성령은 이처럼 내 안에 소원을 두시기도 하고 말을 거시기도 하시지만 그래서 불안을 더하시기도 한다. 다들 저기에서 열심히 사는데 나는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이 길이 맞나? 싶은. 그런 것들이 때로는 나를 보채고 채근하여 더욱 더 불안하게도 한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죄책이 들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책망하심을 느끼기도 한다. 전적으로 이는 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으로의 의무를 상기시키심이다. 불신자는 가책을 느끼지만 신자는 죄책으로 주를 바란다. 가령 어제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선지자 나단이 말씀으로 찾아올 때 다윗은 절규하며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였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6-7).” 아니면 살 수가 없겠다. ‘오, 주의 사랑이 나를 내버려두지를 않으신다.’ 그래서 나는 주의 뜻대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것으로 성령이 나를 돌보시게 한다. 특정한 날, 행사에 참여하는 정도의 경건이 아니다. 주일만 주일이 아니고, 부활절만 부활의 날이 아니다. 일상이 주일이고 부활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성경의 주제는 하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그리하여 경건의 능력도 부어주셔야 감당할 수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저들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7).” 종종 누구와 통화하다 저의 많은 학력과 경력과 자신감이 오히려 저의 믿음을 말소시키는 것을 느낀다. 뭐라 하면, 저는 늘 다 안다. 다 아는 것 위에 자신의 판단과 기준이 스스로의 이성과 납득을 발판으로 삼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가려버린다. 나더러는 자꾸 유연성을 좀 가지라고 쯧쯧, 한다. 나는 저와 있으면 졸지에 옹졸한 일개 광신도가 된다. 언제부턴가 저에게는 기도나 찬송이, 말씀이나 예배가 거리에 놓인 자판기가 되었다.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일이란 소리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마치 저는 나에게 나를 돌아보게 하는 반사판 같다. 저의 말에 동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나는 나의 자유의지도 반납한다. 나의 선택도 버렸다. 무엇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확신도,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시 52:4).” 행여 내가 그러할까 두려워 주를 바랄 뿐이다. 이는 도엑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도엑이 들어야 할 소리로 나는 두렵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5).” 그렇게 또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도 두렵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그러니 나에게는 단지 길을 가다 자판기에서 내 의지로 필요를 선택하듯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사는 게 아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2).” 그 들을 귀를 상실한 시대를 살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래서도 더욱 나는 내 안의 두려움으로 성령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 적당히 안주하며, 남들 다 가는 큰 길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52:7).”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다들 어쩌고 산다 해도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8).” 그렇게 나는 구별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