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재건을 위해 스룹바벨과 예수아 두 사람이 수고한다. 그러나 저들을 훼방하며 방해하는 무리가 수시로 있다. 70여년의 포로생활로도 정신을 못 차라리는 형국이다. 그럴 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 가령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 다윗을 두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항상 그 뜻을 살펴 만군의 여호와를 마음에 모심이었다. 앞서 모세를 하나님은 친구같이 대해주셨고 이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오늘 스가랴의 배경은 주전 580년 저들이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이 지나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이에 성전을 건축하려는 데 있어 서로들 갑론을박 싸움질로 16년을 더 허비한다. 이 시국이 성전이 필요하냐? 에서부터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인데 그 돈을 어찌 마련할 것인가? 하는 일에까지. 예나 지금이나 이쪽과 저쪽은 갈려 서로의 정치논리와 진영논리로 다투며 허송세월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것도 그럴 것이 대략 성전 건축비용으로 금 10만달란트가 들어간다고 하는데, 금 한 돈이 오늘날 27만 원니까 금 1달란트면 8800돈. 10만 달란트면 237조 6천억 원 정도의 금액이겠다. 그러니 이성적인 논의로는 감당이 안 되고 이게 싸움의 빌미가 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종종 그래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소리로 주의 일을 미루거나 주춤거리게 된다. 한데 성경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로 13500명의 미디안 군대를 상대했다. 다윗은 물맷돌 두 개와 막대기로 골리앗 장수와 맞섰다. 오늘 말씀도 그 내용이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성경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다.
가령 어제는 좀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예전에 모 회사 출판부에서 종종 교정이나 녹취록 분해 등을 하였다. 그때 회사에 등록된 내 통장을 나는 몇 년째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그곳에서 그 일을 부업으로 하고, 이래저래 얽혔으니 그냥 내 이름으로 알바비를 수령하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통장으로 입금을 했다는 것이다. 통장도 버리고 계좌번호도 모르는데, 백여만 원의 돈이 입금되었으니 확인하고 좀 보내달라는데 이게 성가신 일이라. 은행에 문의하고 앱을 깔고 어쩌고, 좌우지간 입금된 돈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하루 이체 한도가 백만 원으로 묶여 있어서 이를 푸는 데는 보안카드도 필요하고 절차가 복잡하였다. 친구는 백만 원만 부치고 남은 것을 후원헌금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그 금액이 186001원이었다. 앗! 전날에 차가 배터리방전으로 수리하고 교체한 비용이 18만원이었다. 아내가 코로나로 공부방 수입이 끊겨 쩔쩔매는 상황이라, 나는 이런 경우도 나아가 그 절묘한 금액 앞에서 피식, 하나님은 나를 웃게 하신다.
그러니 오늘의 시편의 말씀을 내가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성경은 그때마다 말도 안 되는 일들로 주의 일을 이끌어 가신다. 태양도 머물게 하시고 달도 그리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수 10:12).” 하나님 앞에서 안 되는 일은 내가 내 마음을 놓고 의심하고 근심하는 것 말고는 주의 뜻을 이루시는 데는 거침이 없으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누구는 우연으로 치부하고 누구는 그저 그러려니 여기고 마는 일상 가운데 소소한 사건과 상황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를 앎으로 절망 가운데서도 주께 아뢰고 고하는 사람들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3-4).”
어제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다시금 확신하였다. 죄악이 늘 나를 붙든다. 회의와 갈등으로 주저함과 의심으로, 그때마다 속삭이듯 ‘어찌 계속 이 길을 갈래?’ 하고 포기를 종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상처가 깊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5).” 아픔도 절망적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6).” 그 열기로 나는 살 길이 막막하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7).” 그러니 어쩔 것인가? ‘현실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게 합당한가? 하고 숱한 내 안의 적들이 수지타산을 놓고 감가상각을 따지기 시작하면,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돈이 어디 있다고? 무슨 인력으로? 우선 먹고 살 집을 마련하고 토지를 개간해도 모자랄 판에 70년 포로에서 풀려나 고작 한다는 게 성전을 짓는 일이라니! 대체 말이 되겠나? 그러느라 또 다시 십여 년의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으니, 오늘 스가랴의 시대나 지금 내 마음의 번민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주님은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나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주님은 주의 일을 하는데 거침이 없게 하신다. 나는 종종, 특히 돈 문제로는 어제의 간단한 에피소드처럼 웃음이 날 정도로 신기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이 일을 두고 합심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그러할 때 성경은 약속하기를, 주께서 감당하신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다른 누굴 붙들고 무슨 하소연을 한들! 있는 이는 있어서 걱정이고 없는 이는 없어서 걱정이라, 서로들 서로를 돌볼 경황이 없다. 그러할 때 우리가 우리의 우울한 영혼을 그대로 두면 자꾸 누구에겐가 ‘따귀 맞는 영혼’으로 살듯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 3:9).”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그 마음의 여유와 영혼의 의연함을 맛보지 못하는 것보다 처량한 신세도 없겠다.
물론 이것이 이 땅에서 영구적으로 지속되지는 못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만 이를 자백할 따름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이 얼마나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인지, 나는 믿음보다 더 쉬운 걸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까닭은 스스로의 생각을 우선하기 때문인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이내 성경은 일갈한다. 우리가 의지할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5).” 어려움에 처해보면 안다. 제일 먼저 멀어지는 사람은 사랑하던 이고 다음은 가까이 하던 이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11).” 이는 저들 탓도 아니다. 사람은 본디 그리 돼먹었다. 그러므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146:3-4).” 다른 무엇을 의지하고 기대본 사람은 안다. 그 결국은 저주 같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나는 이러한 경험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실망과 좌절이면 혹시나 하고 또 누군가에게 기대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 성경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어려움을 겪는 일은 당연하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시 38:12).” 그럴 때마다 일일이 투쟁하고 나서서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려 하는 것 자체가 오만함이었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13-14).” 우리의 침묵은 비겁한 게 아니다. 그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묵묵히 주를 바람은 그 어떤 수고나 애씀보다 치열하고 가혹한 참여다.
주님이 이를 사셨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2-25).” 오늘의 내가 여기 이렇게 주의 길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은혜다. 여기서 저기, 예전의 나와 같은 누구의 삶을 보고 있으면 정작 무엇이 기근이고 기갈인지 눈에 선명하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는데 그저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 이성적인 판단으로 접근하려고 하니까, 아주 오랜만에 통화를 하고 근황을 접하여도 그 사는 모양은 하나도 나아진 게 없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슥 4:7).”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큰 산도 평지가 되어 성전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 은총이라, 은총이라. 나는 절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하든, 스룹바벨은 다림줄을 가지고 성전 건축을 위하여 계측한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10).” 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오늘을 사는 나의 소소한 일상의 여러 끔찍한 사건과 상황과 모양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주께 아뢸 뿐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시 56:1).”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3).” 이제 더는 다른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오직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 그러므로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9).” 이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