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스가랴 5:3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6
오늘 스가랴는 두 개의 환상을 본다. 하나는 펼쳐져 하늘에 나는 두루마리를 본다. 그 글에는 도둑질하는 자와 맹세하는 자에 대한 저주가 있다(1-4). 또 다른 하나는 ‘에바’ 즉 뒤주를 본다. 뒤주 안에 죄악 된 여인이 갇혔고 날개 가진 두 여인이 이를 들고 바벨론 땅으로 가 신전에 둘 것이다(5-11). 포로에서 귀환하여 16년이 흐르는 동안 성전 재건을 두고 갈등하는 저들은 기약이 없다. 그렇듯 암울한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영적인 교류가 활발하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십 규빗은 9미터, 십 규빗은 4.5미터 정도 크기의 큰 두루마리다. 보통 이것이 말려 있는데 펼쳐져서 하늘에 날아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박함을 말한다. 그리고 한 에바에는 보통 곡식이 담기는데 20리터 정도가 들어간다. 생각보다 작은 공간 안에 성인 여성이 들어가 갇히는 일은 쉽지 않다. 이에 여인상을 떠올리게 되고, 저들이 섬기는 우상을 말한다. 우리는 그렇듯 문양이나 상징, 표징을 간직하며 알게 모르게 그 앞에 번영을 빈다.
이러한 말씀의 선포를 보며 그저 무덤덤한 사람이 있고, 아예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있겠으나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며 영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말씀이 뿌려지는 형태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누구는 어려움을 통해, 누구는 누군가의 권유로, 누구는 우연히 이끌리다 말씀을 접하고 고꾸라지기도 한다. 결국은 우리 안에 죄를 죽여야 한다. 곡물을 담아 보관하는 에바가 우리 안에 있다. 늘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하는 세상에서 마치 나름들 보험을 들듯 우상을 그 안에 하나씩은 모시고 산다. 누구는 자식 키우는 맛에, 누구는 돈을 불리고 재산을 비축하고, 누구는 취미활동으로 나름은 건전한 도전을 성취함으로 저들에게는 그것이 에바에 담은 자신들의 우상이라. 특히 아이에 대한, 혈육에 대한 사랑은 끊으려야 끊을 길 없는 신주단지 같다. 그러나 성경은 가열하다. 즉 가혹하리만치 냉정하고 격렬하게 말씀하신다. ‘죄를 죽이라’는 것. 몸의 일을 죽이라는 것.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이는 그저 그러면 어떨까? 하시는 권유가 아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5-6).” 그 구분은 엄연하여 예외는 없다.
누구와 통화가 됐다. 하도 오랜만이라 어디 해외로 선교를 떠났는가, 하고 있었다. 에둘러 이런저런 근황을 말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코로나로 그 교육기관마저 문을 닫게 되어 선생과 상담하고 아이와 같이 잠시 휴식하고 있던 때인 모양이다. 나는 직접적으로 대놓고 묻지 못했다. 아이가 곁에서 노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해주세요.’ 하는 말에 마음이 울컥 했다. 우리의 어려움은 우리 안의 에바 속에 내가 고히 모시고 쩔쩔매는 우상을 끄집어 올리게 한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중 자식이나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가장 크다.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이에게 쩔쩔매며 온갖 것을 다 맞추고 사는구나, 하는 인상이 저이에게 있었다. 남편은 늘 교회 일로 바쁘고, 저이는 이를 벗어나려는 듯 꿈을 꾸듯 선교를 갈망하며 살았다. 언제도 저와 대화하며, 도망치고 싶으신가? 하고 물었을 정도이다. 설령 우리의 생각이 주의 일을 빙자하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이는 참혹하다. 그러나 나름 한다고 하는 만큼 억울함이 쌓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사명을 가지고 주신 삶을 다한다는 것은 물론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한데 이를 분별하기가 자칫 자신의 모양과 형상의 삶을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가열차게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을 필연적으로 따르게 하신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이는 참으로 속수무책이라. 몸을 입고 살면서 몸의 행실을 어찌 죽일 수 있을까? 더욱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우상과 같아서 이를 숭배하듯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곁에 아이가 있어 말은 못하지만 저이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전전긍긍 아이 곁에서도 아이를 어쩌지 못해 애지중지 안절부절 쩔쩔매며 양육하였는데, 어쩌다. 내년이면 벌써 초등학교에 가야 하는데, 저이의 한숨이 깊었다. 나는 말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고 저이가 돌리는 말 속의 말을 가늠하였다. ‘기도할게.’ 하는 나의 말 속에 주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랐다.
우리는 단순히 뜻을 정하고 마음을 다한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일은 너무 가혹하다. 사람을 살며 그 육의 소욕을 능가하는 일이란 우리로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성경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알린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나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이 소극적이라면 새 사람을 입는다는 일은 매우 적극적인 일로 그 결단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이는 먼저 남들처럼, 여느 부모의 사랑으로는 맡기신 아이를 영적으로 양육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물론 ‘아이가 느려서’ 그런다고 하지만 젖 뗄 무렵 영어 교재를 들이밀고, 선생을 집으로 부르는 극성을 떨기도 했다. 아이 가진 입장으로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게 실은 이 세대가 그리 몰아가는 정석 아닌가? 여기 동네도 이상한 풍토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 책장’이다. 곁에 같이 쓰는 사무실 누구는 아이들 책값으로 들어간 돈만 수천이다. 무슨 전집, 어느 위인전 하는 따위로 거실이 가득했더란다. 보면 한쪽은 너무 과하고 한쪽은 너무 방임이다. 먹고 사느라 그럴 겨를이 없어 아이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공부방으로 오던 아이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이에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성경은 마음과 심령을 구분하신다. 마음은 조급하여 생각을 담고 몸을 재촉한다. 심령은 이를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 곧 해야 할 일과 우선 할 일을 구분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1).” 더욱이 믿는다는 사람으로 그 마음에 열정을 품고는 하지만 그 마음이 정녕 하나님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 상대적으로 고집을 부리게 된다. 나는 그때 저이가 왜 자꾸 해외 선교를 바라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좀 억지스럽다 하는 설명을 듣기는 하였으나, 굳이 그게 그럴 일인가? 싶어서 몇 번은 내 생각을 말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가장 무서운 일 가운데 하나는 주의 일을 낭만적으로 꿈꾸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상대적으로 문자적인 해석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수도원을 찾고 고립무원으로 자신의 울타리를 높이 쌓아 성결을 도모하려 들던 빅토리아 시대의 경건주의자들과 다를 게 없다. 당면한 현실을 모면하고 회피하려 드는 시도를 ‘주의 일’이라 합리화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생각처럼 그리 엄청난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읽고 묵상하고 살아가는 일이면 된다.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것은 의당 묵상에 따른 성령의 간섭이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그러니까 나의 합리적이고 합당한 생각이 도출해낸 결론이 아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위인들이라 해서 옳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영광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이다. 결국은 갈린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이는 우리가 임의로 받고 말고 하는 판단의 결과가 아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 우리는 다만 주를 바란다. 영적으로 생각함이란 내가 원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그런 우리는 묵묵히 오늘 하루, 주신 날의 삶으로 족한 것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의 근원은 세상을 바꾸고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이와 같은 또렷한 명제 앞에서 우리는 때로 함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요, 하면서 토를 달지 않는 것도 지혜다. 그러할 때 안에 ‘에바 속 여인’, 우상숭배를 그칠 수 있다. 구원은 오직,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이처럼 극명하여 따로 설명을 덧붙일 게 없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 심지어는 넘치는 애정과 사랑이 주의 일을 훼방할 수도 있다. 가령 아들에 대한 나의 애틋한 마음은 점점 입 속의 말로 삼키게 된다. 그러는 만큼 주의 이름을 부르고, 나에게 주신 특권인 설교를 통해 주의 말씀으로 전한다. 이는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라는 의도다. 여태 주께서 이만큼 함께 하셨던 것처럼 남은 날도 모두 주의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고전 4:7).” 나는 이를 붙들 따름이다. 어찌하시든 주의 것이라. 하물며 내 몸 하나 내 뜻 같지 않음을 절감하는데 자식인들 내 맘 같을까? 내 마음이 아니라 나의 심령을 주관하여 주시기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나는 오늘 스가랴가 보는 두 가지의 환상과 어제 누구의 이야기와 요즘 나의 마음을 한데 두고, 주께 고한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