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스가랴 10: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편 62:1
인생이 한 모금 입김 같아서,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슥 10:11).” 그러할진대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2).”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말씀이 주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그저 삶을 돌보고 인생을 돌아보다 보면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그 허무함에 대하여는 서글픔뿐이라. 일련의 여러 사태를 보며,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슥 10:1).”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에 안도한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자부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불안해하고 그 어미는 아등바등 살 궁리로 바동거리는 때에,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슥 4-5).” 이 모든 일의 주인되시는 이가 나의 구주 아버지 되심이 참으로 감사하다. 이와 같은 고백이 내 안에 계신 성령의 고백인 것을 나는 이제 실감한다. 누구를 위로하면서 저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생각한다. ‘말씀, 창조주 하나님과 계셨던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저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까닭은 우리로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영생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은 한이 없다.
전염병은 창궐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하여지고 저마다의 생은 지쳐갈 때 우리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마주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를 알면 알수록 행여 나의 염려와 불안이 또는 고약하고 추한 마음이 주를 멀리하지 않을까? 저가 내 마음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오히려 귀하였다. ‘샘물과 같은 보혈’을 작시한 윌리엄 쿠퍼는,
주님을 탄식하게 한 죄,
내 가슴에서 떠나시게 만든 죄를 미워하나이다
하고 고백하였다. 다윗도 부르짖는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그리고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우리는 이를 알고 정직한 영을 사모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다들 사는 게 참으로 팍팍하다. 유난히 어려운 시절이다. 집집마다 어려움이 없는 집이 없다. 누구의 사연을 듣다보면 슬프고 서러울 따름인데, 그때만큼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할 수 있는 때가 또 어디 있겠나? 언제 우리가 그처럼 간절히 주를 구하며 자신을 돌이켜 주의 도우심을 구할까? 영혼이 짓눌리는 것 같은, 혼자 버려져 더는 아무도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을 때, 이러한 우리의 암울함이 주께 향하는 마음에 더욱 선명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마치 성장통과 같이 우리의 영혼이 성숙하는 데도 고통을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 영혼이 죄악 됨이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1-3).” 얼마나 우리는 발 빠르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던가? 그러나 행복은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것으로 인위적이었다. 있다 없어질 작은 선물 하나에도 행복했다 불행했다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그러니 그 거룩을 우리가 어찌 도모하고 취할 수 있는 것이겠나? 내 안에는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이 싸운다. 고약하기 짝이 없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돌아보면 나는 어느 것에서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여전한 성질로 부딪친다. 그러나 또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우리는 일반인들과 달리 복잡하다고 하였다. 일반인은 단순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이다. 저 둘, 우리 안의 영이 싸운다. 그리스도인이면 내 안에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고 자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게 우리 의지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어서 늘 도드라지게 삐쭉거리는 것은 육체의 소욕 때문이다. 이에 날마다 부대끼며 싸운다. 그와 같이 싸우는 중에 우리 영혼은 자란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아무런 부대낌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마비된 영혼이거나 죽었거나. 그리하여 우리 속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때에 주의 사랑이 함께 하고 계셨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주의 영이 아니면 이와 같은 갈등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은사보다 더 큰 은사가 있었으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이는 내 안에 계시는 말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1-3).” 내가 아무리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내 힘으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도 맺을 수 없다. 사랑은 단연 열매 중에 첫 번째다. 종종 내가 두 감정이 공존하는 것을 보는데, 하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악하고 추하였나? 하는 회의감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누구로 인해 마음이 쓰이고 저를 위해 기도하며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는 중첩되는 두 자기가 자주 싸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나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성령의 열매도 주의 사랑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일이고, 육신의 생각도 내가 버릴 수 없어서 주의 영이 이를 탄식하며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였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고,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사랑하게 한다. 그 사랑은 희한하여서 원수도 사랑하게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야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들도 하는 일이어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가령 어느 아이를 생각하면 고약한 기억으로 괘씸하고 그저 불쾌할 따름인데, 저를 곁에 붙이실 때는 나도 알 수 없는 측은지심인지 저를 위하여 기도하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그렇게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에 자라가고 열매를 맺는다. 사랑 다음에 오는 희락은 그저 즐거운, 행복이 아니다. 이 놀라운 사실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또한 신기하여서, 가령 새벽이면 베란다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이처럼 묵상글을 쓴다. 냉기가 가득하여 온풍기를 켜고 한참은 오돌오돌 떤다. 책상 한편으로는 여름에 쓰던 선풍기 두 대가 비닐로 싸여있고 그 위 옷걸이에는 안 입는 옷들이 비닐에 담겨 치렁치렁하다. 흡사 세탁소 한 구석에 앉은 듯 볼품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 아침, 이 자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시간을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깨면 시간을 확인하며 조바심을 내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연애하는 사람 같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관이지만 나의 보잘것없는 이 지식과 마음으로, 어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볼품없는 한 날의 시간으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주를 사랑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1장 강해>를 다 읽어가면서 <요한복음 3장 강해>를 선주문하였다. 그러니까 이런 책이 자꾸 읽힌다! 값도 만만찮고, 같은 말이 반복되고, 늘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아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 ‘신앙서적’이 언제부턴가 자꾸 이렇게 읽힌다. 것도 이런저런 어느 신학자들의 신학적 교리적인 주장이나 저들의 역할, 또는 누구의 근사한 이력을 나열하고 있는 자서전 같은 내용은 읽기다 싫다. 예전에 즐기던 달달한 연애소설도 이제는 아니다. 읽히지가 않는다. 종종 누가 책을 내서 보내오면 미안하게도 나는 대충 훑어보다 한쪽으로 치운다. 그야말로 치렁치렁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온통 다 아는 설교 같이 지루란 얘기, 그의 이야기,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는 이야기만 자꾸 읽힌다. 이 즐거움, 이 행복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성령의 열매, 희락은 그렇게 내가 어찌 꾸며내서 느낄 수 있는 좋음이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에게 권한들 저들도 자의적으로 그러한 희락, 즐거워할 열매가 그 속에 저절로는 생겨날 수 없다. 또 지겨운 설교 같을 뿐이다! 지금의 이 묵상글처럼.
그렇게 내 안에 빚어지는 화평은 분명히 내가 취한 게 아니다. 나는 병적으로 불안을 못 이겨 정신과를 다니고 안정제를 먹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몰아쉬는 환자다. 그런데 희한하지? 알 수 없는 평화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안다. 병적으로 끝 간 데 없이 비극적인 상상을 하고 그 불안으로 작용하는 몸의 증상들 호소하면서도 그와 별도로 내 안에는 나도 알 수 없는 화평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는 내가 그래야지, 해서 느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안에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 설명할 수 없는 위로와 평화가 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5-7).” 현실은 그게 아닌데, 남들은 알 수 없는, 그러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화평이다.
저들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7-38).”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을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말씀은 그게 우리들인 것을 알게 한다. 말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 오늘 이처럼 내 안에,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충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의 노래는 진귀하나 내 것도 같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1, 8.
그러니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의지할 것 없는 인생에서,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