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스가랴 11:4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편 63:6-7
주가 맡기신 날들을 살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맛보아 아는 것으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은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4).” 이와 같이 우리가 살면 우리 안의 성령은 열매를 맺으신다. 아홉 가지의 열매는 세 가지씩 묶어 하나님과의 관계(사랑, 희락, 화평), 사람들과의 관계(오래 참음, 자비, 양선),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충성, 온유, 절제)로 설명될 수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여기서 바울은 ‘열매들’이라 묶어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한데 묶어 말할 수 없는 개별적이면서 전체가 하나로 동시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 열매는 하나로 익어간다.
성령의 열매 사랑은 모든 열매의 중심으로 아무리 날고 기는 신앙과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의 형질은 특징적이어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여기서 ‘사랑과 진리’는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는 곧 말씀으로 태초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오늘에도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고(마 5:44),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게도 하신다(눅 6:32).
성령의 열매 희락은 가공할 수 없는 기쁨이다. 행복과는 다르다. 행복은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며 매우 감정적이다. 참 기쁨은 주 안에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희락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관용이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곧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은 우리로 낙심에 빠져있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넘어지고 자주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 희락이다. 희락은 ‘알 수 없는 기쁨’이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기쁨의 형질과는 다르다.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있다. 오늘 시편의 찬양도 같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6-7).”
성령의 열매 화평은 그리하여 나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화평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이상한 평안이다. 이런저런 생활의 질고는 엄연히 따라붙는데 그럼에도 전과 다르게 화평하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희한하고 이상한 경험이다. 죽겠는데 살겠고, 걱정이 태산인데 심령은 안도한다. 이 모두는 ‘주의 이름’으로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우리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그리하여 어떤 죄 때문에 억눌린 채 살아가지 않는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25:11).” 오, 하찮은 날 위해 주가 변호하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54:1).” 마음 저 깊은 데서 우러나는 여유가 있다. 저들은 알 수 없는 심경이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 그렇게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1).”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주가 내 안에서 지키시는 화평이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은 사람과의 관계이며 사람으로 사는 동안의 훈련으로 연마되는 마음이다. 사랑의 특징이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희한한 은혜이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7-8).”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겠으나 먼저는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가 피곤하여 낙심할 때 예수를 생각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저들과 맞대어 욕하지 않는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과 같이 바울 사도도 그러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성령의 열매 자비는 곧 친절함이다. 오래 참음이 소극적인 대응이라면 친절함은 적극적인 대응이다. 반격하지 않고 응수하지 않으며 오히려 친절하게 저를 대한다. 왜? 이는 하나님을 생각해서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지만 엄연히 단호함을 내포한다. 악에 순응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5:12).” 예수님은 인자하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이에 따른 경고는 가차 없으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3:27).” 고로 우리의 자비는 적극적으로 상대함으로 죄악을 압도한다.
성령의 열매 양선은 연마이고 단련에 의한 수양의 열매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이와 같은 말씀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런데 내 안의 성령께서는 여기까지도 열매를 맺게 하신다. 실제 양선은 오랜 연마로 연단에 따른 소망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저를 오히려 위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저에게 앙갚음 하는 것 이상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이다. 실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은 인내를 더하고 인내는 연단을 통하여 소망에 이르게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성령의 열매 충성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나 자신과의 관계다. 은사로써 값없이 주신 믿음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이 다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에 머물면 충성은 거리가 멀다. 믿음은 결국 성실함으로 증거되고 성실함은 충성의 다른 이름으로 내 안에 작동한다. 충성은 그야말로 적극적인 성품이다. 그저 무던하여 뭉개는 따위의 우직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곧 충성은 생명의 면류관을 보장하고 약속한다.
성령의 열매 온유는 그 위로를 주께 두는 마음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그리하여 내게 주신 여기, 오늘의 이 현실을 겸손히 견디며 딛고 산다. 이는 스스로의 상태를 아는 데서 오는 경외심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은혜는 저의 것으로 자신은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넘치는 사랑을 더하시는 데 따른 감사와 겸손으로 은혜의 양적, 질적 무게감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온유는 겸손이고, 겸손은 능력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남과 다른 모습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그렇듯 온유는 겸손함으로 우리 기쁨의 원천이 된다.
성령의 열매 절제는 맨 마지막에 오는 것으로 첫 번째인 사랑에서부터 두루 거쳐 얻어지는 열매다. 사랑에 절제가 더하지 않으면 집착이 되고, 희락에 절제가 없으면 쾌락을 추구하고, 화평에 절제가 없으면 안이함과 무기력함에 빠지고, 오래 참음에 절제가 없으면 우유부단함으로 결단의 때를 놓치지 십상이고, 자비에 절제가 없으면 유야무야 모두에게 친절함으여 싱겁고, 양선에 절제가 빠지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느라 자신에게 바라시는 삶을 팽개치는데 이는 회피가 되고, 충성에 절제가 없으면 헛되이 희생하게 되고, 온유에 절제가 없으면 악을 묵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절제에도 절제가 있어야 자기 의를 따라 살지 않는다. 절제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끝에서 밀고, 사랑이 모든 열매를 이끌어야 한다. 아니면 극단적인 개인화가 오고 외따로운 삶이 되려 한다. 간혹 수도원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 모든 열매에 절제가 도를 넘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게 한다. 절제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열매의 필연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절제는 우리로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게 하는 자리로 이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훈련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오늘을 사는 사명이며 한 날을 더 연정하시며 맡기시는 이유다. 이는 오늘 스가랴의 목소리로 다시 되새기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슥 11:4).” 곧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승천에 앞서 이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주를 사랑한다면 나타나야 하는 당연한 반응이다. 단지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이상의 일상을 포함한다. 비록 ‘잡혀 죽을 양 떼’라 해도, 즉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덧없는 밥벌이에 불과하다 해도 이 또한 주가 맡기신 사명이다. 산 자는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고, 살아야 산 자로서 주께 충성할 수가 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는 길은 주신 바, 한 날의 삶에 충성하는 것이다. 이 모든 날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슥 11:17).” 주어진 한 날에 감사하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않을 때의 고통은 고스란히 자기 몫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성령의 통제와 훈련에 기꺼운 마음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마치 큰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이 코치의 구령에 따라 훈련을 하듯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시려는 데 따른 결실이면서 축복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우리 안에 주의 은혜를 갈구하는 마음은 본질적인 문제이지 선택이 아니다.
어제 하루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이와 같은 설교를 읽으며, 나는 누구를 생각하였고 저들을 응원하고 위하여 기도하다 내 안에 도는 이와 같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더욱 갈망하였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오늘 나에게 맡기신 ‘양 떼’ 그 소소한 일상의 여러 죽을 것들에 대하여 사랑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으로,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6)” 주를 바람은 막연한 구조신호가 아니었다. 이미 나의 도움이 되셨고, 나는 즐거이 부를 권리를 부여받았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7).” 이에,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3,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