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3:1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65:4
올 한 해는 참으로 어렵게 지나간다. 걱정과 근심이 늘 우리 목을 조르는 것 같다. 그때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며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 복이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10).” 가만히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어느 것도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이는 우리의 더러움을 씻기는 시절이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주가 늘 함께 하심을 누린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지난 한 해는 우울하였으나 그것으로 주의 은택을 어느 해보다 뚜렷이 느낀 것 같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시 65:11-12).”
여전히 사는 날 동안에는 어려움과 근심이 떠날 날이 없겠으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말씀이다. 연단이 없으면 사생아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오늘을 사는데 이런저런 어려움이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우리로 더욱 간절하게 또는 조심스럽게 주를 바라게 하심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나도 늘 그렇지만 언제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설마, 하는 방심이 노아의 때와 다르지 않다. 종종 저의 외로움을 묵상한다. 120년을 방주를 지었다는 것이 어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겠나? 처음엔 누가 동조하고 같이 거들지 않았을까? 친구가 또는 가까운 이웃이 홍수 심판의 예언을 듣고 겁먹지 않았을까? 그렇게 또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지나 해를 거듭하는 동안 사람들은 무뎌져 갔을 것이고, 후에는 ‘농담으로나’ 저의 말을 듣게 되었을 일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눅 17:27-29).” 마치 오늘 날 전염병이 창궐하여 코로나가 코앞에 이르렀는데도 다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그저 사느라 사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한 때에 오늘까지 평안한 것은 주의 은혜다. 나는 매번 이를 실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나는 세상을 보다보면 주를 더욱 바란다. 누구의 사연이 남 일 같지 않다. 엊그제 염려하게 하였던 일이 주의 은혜로 비껴갔다. 조카애는 음성이 나왔고 아내는 안도하였다. 실제 무슨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렇듯 방심하고 설마하며 산다. 사느라 여념이 없어 하나님을 등한시한다. 그럴 때 주의 말씀은 번거롭고 지겹기만 하다. 기어이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 안이함이 주동을 한다. 나는 이를 근심한다. 행여 나의 영혼이 느슨하여 헐거워질까. 그래서 또 예전 생활로 돌아갈까.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까. 과연 노아와 같이 그 긴 기다림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다들 괜찮다고 하는데 나만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닐까? 근심은 나로 하여금 간절하게 주를 바라게 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87:11).”
세상은 그럭저럭 돌아가고, 사람들 사는 이야기는 다 거기서 거긴 것 같아서, 저 혼자 산 위에 방주를 짓는 꼴로 믿음을 지키기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살고 있는데! 혼자 이러고 있는 내게 누구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였다. 책임감을 다하지 않는 처사라고도 하였다. 나는 반박할 말이 없어, 가만히 주를 바란다. 노아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3).” 그때마다 주가 나보다 앞서가시며 곧은길을 놓으셨다. 나의 연약함을 저가 아신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3).” 그러할 수 있도록 주는 나의 걸음을 인도하셨다. 지금과 같이 다들 예민하고 불안한 사회에서 우리 안에 두시는 화평으로 알 수 있다.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심은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남들이 뭐라 하는 소리를 귀 담을 것 없다. 저들이 좇는 세상을 부러워할 일도 아니다. 저들은 알지 못하고 듣지 않는다. 주를 향하는 마음을 바로 지키며 사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절이다.
왜냐하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로 질식할 지경이다. 서로의 진영논리로 사안을 파악하고, 저마다의 이권다툼으로 패를 가르며, 상대를 향한 비아냥거림과 격한 말은 저질스럽기 짝이 없고, 도를 넘어 저의 학식과 경륜은 똥값도 안 될 것 같다. 그런 저들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느 한 쪽에 편승하지 않고 주만 바라기란 쉽지가 않다. 목사들이 나서서 왈가왈부하며 선동하고 교회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이때에, 나는 기사 밑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치욕스럽다. 말의 격은 찾을 수 없고 싸지른 말에서는 악취만 난다. 어느 목사가 음란마귀를 운운하며 음란한 짓을 행하고, 자신의 신념을 성경보다 우위에 올리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배교는 순간이고 이단은 거듭된다. 생각하기를 노아의 삶이 복되었구나! 묵묵히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사는 일이 가장 행복하고 수월하다. 믿음으로 주를 바라는 일이 세상을 기웃거리는 일보다 쉽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것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려는 것보다 수월하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이를 마치 엄청난 고난의 길인들 호들갑을 떨다가도 가만히 하나님 없는 자들의 형편을 보면 선명해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딱히 누구를 생각하며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저들의 무거운 멍에가 안쓰럽다. 기어이 하나님을 못 미더워하는 만큼 그 무게를 오롯이 자신이 지고 살아야 한다. 장성한 아들을 돌봐야 하고, 본인의 우울증에도 밥벌이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일처리에 저의 영혼은 지쳐간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으니, 그 짐을 고스란히 자기 등에 이고 사는 보리새우 같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 하시는 주의 음성이 저이에게도 언제쯤 들려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 나도 전에는 하나님만 싫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의 선과 의와 사랑에 대해서는’ 좋은데 그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일은 싫었다. 그러려면 나의 즐거움은 절반으로 줄고, 나의 위로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데. 그래서 같이 어울리던 사람들도 적당히 믿는 자들이었고, 그때를 돌아보면 오늘의 긍휼하심이 면구스럽기만 하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5-6).” 나는 늘 이 말씀 앞에서는 오금이 저린다!
일련의 사태에서 주의 은혜를 경험한다. 올 한 해, 아슬아슬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던 해였는데도, 이 모든 무사함이 그저 그런 일상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방심할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10:31-32).” 히브리서 기자와 같이 오늘 스가랴서를 읽으면 두려움이 감사함으로 변한다. 결국 주의 권능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가 저를 사랑할 줄도 아는 거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 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안도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슥 13:2).”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그때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3).”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한 날도 살 수가 없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4,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