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말라기 2:16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말씀은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다. 실제고 일상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교훈이 아니라 삶이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자주 갖는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마치 일상이 되어 우리 사회의 다반사가 되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하고 오늘 말씀은 실질적인 삶을 지적하신다(말 2:16). 때론 그것이 헐겁거나 너무 조여서 우리를 너무 억압하거나 흩어지게 하는 것이라 해도, 그 짐을 지는 것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이를 마치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일로 여기고 살려니까 삶이 고단할밖에. 모든 게 주의 인자하심만을 의뢰하게 하실 뿐,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6).” 이 모든 질서와 윤리와 도덕은 하나님 본인이 되신다. 우리와의 관계는 괜한 게 아니었다.
구원은 여러 형태로 개별적이나 방식은 하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러니 우리가 어찌 다시 날 수 있겠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나의 고백과 성령의 도우심으로다. 우리는 사람의 뜻대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난 자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우리가 가장 어려운 상대는 우리 자신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 이것이 나의 실체였다. 그런 내가 아내를 지키고 아이들을 건사한다고 하였으니, 그 마음에들 상처밖에 준 것이 더 있었겠나? 돌아보면 모든 게 은혜였다.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
어제 주일은 햇수로 13년, 만으로 12년째를 맞는 예배였다.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하여 신대원을 시작하였던 2009년 2학기를 마칠 때, 난데없이 3학기 때부터는 ‘실습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각자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로, 어느 부서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서 하고 있는지를 매월마다 보고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 역할도 없었다. 그러니 그 나이에 새삼 어느 교회 전도사로 갈 수도 없고, 그때 누가 권하여 ‘글방’을 ‘교회’로 등록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시작하면서 본의 아니게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해 12월에 우리 교회는 생겨났다. 얼결에 교회 등록을 하였고, 얼결에 글방에 오던 아이들에게 공개를 하여서 누구는 예배에 나오고, 누구는 그 사실로 인해 글방을 그만두었다. 어느새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나는 본래 무슨 기념일, 몇 주년, 하는 식의 날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제는 감회가 새로웠고 오늘에 처한 우리의 형편에서 감사가 저절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나 같은 자’를 돌이키시려고 그처럼 하나님은 치밀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계셨다.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 가히 구원은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개인적으로는 이는 나의 문제고, 우리 가족의 문제이며, 거쳐 가듯 지나간 한 사람 한 영혼의 역사이고, 실제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18).” 나는 이것이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 교회의 역사가 된 것에 감사한다. 중간에 막혔던 담을 ‘자기 몸으로’ 허셨다. 저가 나의 주님이시다. 나에게 허락하신 가정과 가족도 그러하다. 두 아이가 장성하여 슬하에 있고 아내가 늘 곁을 같이 하며 나를 돌보았다. 모두는 은혜인데, 이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다. 그처럼 나로 주의 가족이 되게 하셨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그리하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더는, 다시는 남이 아니다. 나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 놀라운 은혜를 산다. 더는 성과나 업적으로 의미를 삼지 않는 이유다. 창립 몇 주년, 하면 따라오는 그러한 결과적인 의미부여에 나는 대거리하는 것을 주의한다. 한 영혼, 다만 곁에 두시는 이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주의 마음으로 마주하게 하시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누가 오고, 가고 하는 데 연연하지 않게 하심이 복이 되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이 교회는, 되었다. 돌아보면 그때는 늘 그 일로 시달리며 좌고우면 했던 것 같다. 아들은 필리핀에 있고 딸애도 다른 교회로 보냈으니, 나와 아내는 그야말로 주일이면 바리바리 먹을 것을 싸서 인천에서 군포로, 누가 오나 안 오나 주일예배를 갔다. 한 애가 다 늦게 오면 그때부터 다시, 우리의 예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일요일 오전, 한 명이라도 오게 하셨다! 것도 늘 희한하여서 예배 후에 같이 음식을 차려먹고 한바탕 소란을 떨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으나 신기하게 넘치는 은혜가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과연 이게 맞나?’ 싶은 갈등도 항상 뒷목을 잡아챘고, 일주일 내내 다른 궁리를 하다 또 주일을 맞이하였다. ‘무엇이 좀 나아졌나?’ 하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다.’
외람되지만 나는 얼결에 하였고 저절로 그리 된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아이들이 장성하여 출가하듯 지나가듯 왔다가 가는 영혼의 일에 나는 관여할 수 없다. 저들을 붙들지 않고 막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으며 그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다를 게 없는 저조한 성과(?)를 모면하지 못하나 더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나의 거듭남과 같다. 내가 주의 한 권속이 된 일과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가 오늘 아침에도 이처럼 나를 마주 앉게 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 얼마나 희한하고 놀랍고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인가? 만일 내가 준비하고 내가 차린 밥상 앞에 앉는 일이라면 거들며 한 마디 하겠는데, 그야말로 나는 얼결에 교회를 시작했고 시작하신 이가 따로 계시니 나는 유구무언이고 감사뿐이다. 보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맡기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렇게 내가 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사랑하면서 알게 된다. ‘아픈 아이’ 하나가 현재 우리 교회 출석 교인의 전부인 셈인데도 나는 이제 조급하지 않다. 왜? 내가 이룰 게 아닌 것을 알았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5:1).” 오게 하시거나 가게 하시거나, 더하시거나 혼자 두시거나 이는 그것도 엄연한 하나님의 일로 여겨, 저가 세우시는 교회로 본다. 나는 그 확신을 얻은 데 대해 감사하였다. 그전에는 마치 다 내가 짊어지는 짐인 줄로만 알았다. 부모로서 자식들 건사하는 일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에서도, 목사나 평신도나 가름은 의미없고 평가는 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평가될 수 있는 실력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며, 머리로도 살 수 없는 희한하고 놀랍고 신기하고 괴상한 일이었다. 나의 지식과 마음과 느낌과 감정과 생각을 총동원하여, 나는 이제 의지적으로 주를 바란다. 그리 바라게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셨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란, 아! 그래서 전인적인 관계라 하는 것이다. 누가 내 형제이고 하나님의 권속인가? 이를 어찌 아는가? 먼저는 본능적으로 가만 있어도 알겠다. 대화나 서로의 관점으로 안다. 어떤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안다. 사용하는 언어나 실행하는 방식, 표현으로도 알겠다. 어쩐지, 그런 사람과는 서로가 알아보고 알 수 없는 친밀감도 느낀다.
가령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면서 요즘은 열 명씩 누구에게 보내는데, 이 또한 어쩌다 그리 되었다. 안 읽어도 되고 실제 잘 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되었다. 그럼 누구는 아멘, 하고 누구는 일 년 열두 달이 지나도 아멘, 한 번을 못한다. 것도 희한한 일이어서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아멘, 하고 받는 게 실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영이 하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나도 그런 걸 알면서도 보내는 것이니까 어지간하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내가 그리 이 묵상글을 보내게 된 것은 친구 딸애가 작가로 살고 있는데 그 애가 잔망스럽게도 자기 글을 ‘주문하지 않아도 배달하는 수필’이라 하여 한두 번 오간 이에게 매 월 한 편씩 보낸다는 말에 풋, 하다가 알았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 전에 시 쓰는 친구 하나가 자신은 자나 깨나 시만 생각한다는 말이 내 마음을 쿡, 찔렀다. 그때 떠오른 말씀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바울의 고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희한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묵상글을 쓰는 일도, 교회를 이루며 주의 전을 지키는 일도, 누가 읽든 안 읽든, 누가 오든 안 오든,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님을 알기에 나의 성과를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 자유롭다.
이 원리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면 <룻의 원리>와 같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저이가 뭘 안다고 저러한 소속감을 느낀 것일까?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실은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종종 여기가 ‘막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다른 한계! 거기서 나는 석탄을 캐야하는 광부처럼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아침이면 기를 쓰고 일어나 묵상을 하고 글을 쓴다. 한 명이 출석 교인의 전부라 해도 나는 일주일 내내 설교원고를 준비하고 다듬어서 주일에 전한다. 아니면? 막장에서 멈추면 되돌아나가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나에게 이 하루는 묵상글과 같이 살고, 나의 일주일은 설교원고를 쓰는 일로 산다. 늘 빌빌하는 몸을 이끌고 살고, 전하는 말씀의 반에 반도 실천하지 못하고 혼자 더 불안을 느끼며 안정제를 의존하고 산다. 사는 일이 때로 고역이라 해도 돌아보면 감사할 것뿐이니, 이 기막힌 나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 사랑으로 묵묵히 준행하며 남은 생을 다하기를 기도한다. 교회도 주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이고, 나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도 저의 몸으로 허무신 것이라! 내가 속한 자리는, 오르바는 제 갈 길로 갔으나 룻은 남아서 왜 남았냐는 말에 더할 말이 없다.
저이의 말이 내 말이라,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나도 가고,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나의 권속이 되고, 그들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없나이다!’ 누가 물으면 이것이 나의 궁색한 말일지라도 나 역시 그리 고백한다. 그러니 오늘 말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내가 아는 이 앎이 옳은지 그른지, 13년을 맞는 교회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 제대로 가고 있나? 알 수 없다 해도, 룻의 고백이 나의 것이고 바울의 고백이 나의 것으로, 이 삶은 내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10).” 하는 오늘 말씀이 나에게는 그리 되묻는 것 같다. 그리하여 다만 나는 나에게 맡기신 이 날을 사랑한다. 어떻게?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