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전봉석 2020. 12. 31. 06:11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2-23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편 71:14-15

 

 

마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집중한다. 복음이 무엇인지, 이를 알게 함으로 ‘고발하는 말씀’,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위로하는 말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그리고 ‘동기를 부여하는 말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에 집중시킨다.

 

매일 한 장씩 묵상을 시작하여 어느덧 구약을 지나서 신약의 말씀으로 건너오는 날 아침,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2020년도 마지막 날에 새로이 말씀 앞에 앉는 기분이다. 늘 그러했던 것처럼 말씀은 언제나 시의적절하게 나를 위로하시고 붙들어 앉히시는데,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삶을 경험하며 사는 일은 복되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의 증거다.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2-23).”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마태는 직시하며 믿음의 계보를 먼저 정리하였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 하나님이 사람의 자손으로 오셨다!

 

이를 묵상하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0-1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는 승복한다. 어떤 상황에서 주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저가 나의 해요, 방패가 되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 삶에서 주의 전에 거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더하신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은혜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며 누구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와 지냈던 날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날들을 뒤로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나는 이제 말씀을 먹는다. 먹고 전한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이러한 경험은 복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먼저 앉으면서부터 나로 점점 말씀을 사모하게 하신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1-3).” 나는 종종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입을 벌린다. 말씀이 입에 달다. 손으로 적고, 적은 것을 들고 다니다 아침이면 펼쳐서 묵상글로 쓴다. 누구의 말에 동의한다.

 

하나님의 만나를 너무 많이 맛보았더니

세상 즐거움이라는 거칠고 시커먼 빵에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군요.

 

그 의미를 확신으로 나를 붙드셨다.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시절을 그리워하다가도 도로 말씀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영, 구미가 당기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의 맛에는 나의 감정도 느낌도 누구의 고백도 가미될 게 없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때로는 말씀이 거칠고 이를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때마다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말씀 앞에 때론 불편하고 부끄럽고 송구할 때도 많지만,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 발가벗겨진 기분은 그래서이다. 모두가 내 이야기이다. 나와 연관이 없는 게 없다.

 

내 안에 스민 말씀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돼 있는데, 먼저는 그와 관련된 책만 읽게 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나 어찌 사네마네 하는 따위의 말들보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모든 사건사고가 나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거는 것 같다. 주의 말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인격과 기질을 남모르게 부끄러워하고 한탄한다. 말씀을 준비하고 다듬는 데서 종종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4).” 굳이 이를 증명하자면, 어제는 가정예배로 드릴 새해 첫 날 말씀과 새해 첫 주일날 말씀을 준비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다. ‘얘가 왜 오늘은 연락도 없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오후 두 시가 넘어서였다. 아이가 출퇴근하며 카톡을 보내고, 성경을 써서 카페에 올리면 알림이 들어오는데 오후가 다 되도록 소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톡을 하니 코로나로 인해 엄마가 집에 있었고, 그러다보니 뭘 하는지 성경도 안 쓰고 그러고 있던 것이다. 이렇듯 ‘형제를 사랑함으로’ 내가 저 애에게 왜 이처럼 마음이 가는지 나는 때로 알 길이 없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7-38).” 어떠한 말은 물론 생각과 마음이 때로는 내 것 같지가 않다. ‘그 배’ 나의 헛된 욕망과 망상과 우울과 선입견과 남을 경멸하는 마음과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던 것들이 나의 뱃속에 가득했었다. 그런 나의 배에서 이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확실히 그렇다고 자신할 수는 없으나 소원하기는 한다. 그러면서 회개가 나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그리하여 나는 머물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말씀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저절로 그리 됨으로 놀라울 때가 더 많다. 이제 확실히 아는 것은 ‘이 소망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그것으로 누구를 위로하고 나 역시 새 힘을 얻는다. 가령 내가 누구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은 저 혼자 요동치고 때론 저의 슬픔으로 안타까움이 가득 들어찰 때도 있지만 그런 저에게 나는 말씀으로 위로할 따름이다. 그럴 때면 이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러므로 고난도 감내하고 이겨내게 하실 것임을,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6-17).” 이와 같은 말씀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자꾸 누구 이름을 적고 저의 사연을 메모한다. 그러는 동안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저가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모든 게 내 맘 같지는 않다. 아들은 돌아오는 2월에 있을 시험을 포기하고 다음 해로 미루었다. 진도를 따라갈 수 없고 한 번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는 게 무모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나는 아내에게 전해 듣고는 그저 모르는 척 하고 있다.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어 애달파하다 그것을 속으로 삼킬 뿐이다. 딸애는 직장생활이 살얼음판이라. 이 와중에도 물량이 많아 연일 야근을 하고 밤늦게 돌아온다. ‘코로나19’로 옆 건물의 누가, 혹은 같은 사무실의 누가 접촉자와 접촉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철을 오래 타고 출퇴근해야 하는 길이며, 이런저런 생각으로는 내 몫의 근심도 감당하기 어려워 나는 자꾸 안정제를 먹는 빈도가 는다. 아내는 늘 조증이 있는 사람처럼 활력이 넘치는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면서 종종 사람을 피곤하게 할 정도이다. 그 속에는 불안과 걱정이 있어서 그렇다는 걸 잘 안다. 그러니 내가 무얼 해줄 수 있겠나? 늙으신 부모는 작은 일에도 노여워하고 혼자들 속 끓이는 일이 잦아서 이를 일일이 건사할 여력이 없다. 종종 우리의 삶은 하루살이 같이 무력하기만하다.

 

그러니 내가 붙들 것은 말씀뿐이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몸은 어디 점점 더 아픈 곳을 더해가고, 그것을 일일이 상대하려다보면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로도 남은 생을 다 바쳐 모자랄 판이다. 누구는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폼 나게 살기를 바라고, 하고 싶은 걸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게 행복이라고 하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이 아침, 복음서의 첫 책을 펼치면서 말씀이 내게 더하시는 은혜로 남은 생이 다하기를 소망한다. 이를 사모하도록 성령을 내게 주셨다는 것을 이제 확신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또 한 해가 저물고 있고 내일이면 새해 첫 날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덤덤히 주어지는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그처럼 예수를 본 적 없으나 그의 말씀으로 저를 알고 믿고 의지하듯,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내일을 알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알지도 못하는 내일은 그토록 당연한듯 그리로 향하여 살면서 보지도 못한 예수를 믿는 일에는 왜 그처럼 인색해하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말씀은 약속이 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그런데 내일은 내일이 와야 오늘인 것인지, 그저 우리의 희망은 얼마나 허당인가? 눈길 위에 뒤엉긴 자동차차 사고 현장 기사를 보며, 어느 철로 위에서 굴착기로 작업하던 인부 두 명이 죽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대체 어디에 더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 71:14-15).” 항상 시편의 말씀은 이처럼 나의 갈 길을 비추신다. 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 말도 안 되는 말씀 앞에서 나는 이제 아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 71:5).” 그러므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