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7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6, 28
가만히 나의 날들을 돌아볼 때 분명한 확신이 든다. 내가 어떠했든지, 죽었던 나의 영혼을 살리신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그때마다 뭔가 판가름이 난 것 같았으나 늘 판세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같이 나의 판단과 기준은 틀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증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신하는 것은 성경에서 출발하게 하시고 성경에서 결론을 얻게 하심이었다. 나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의 고백에 의한 일도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새해 첫 날 굳이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으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덕담을 건네는 일에서도 나는 객쩍은 소리에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말씀을 건네고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 공연한 말과 새삼스러운 안부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였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각자의 역할을 지켰고, 아내는 코로나 시국에 나름 요양사자격증에 운전면허증에 이제는 미술치료사자격증에 도전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나 주시는 날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고 나아갈 따름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남들의 이런저런 형통함을 보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저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것 같은데, 그러니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 같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행여 이를 부러워하여 저들의 길을 좇을까, 나는 마음을 졸인다. 젊을 때 아직 괜찮다고 여길 때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하는 시인의 비애를 우리는 종종 믿음으로 살면서 괴로워한다(시 73:12-13). 그럴 때, 나의 이제 결론은 성경으로다.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와 일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실적이 쌓일 때 확신을 더한다. 사람으로 연연하지 않고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후회도 그리움도 모두 허사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은 주께서 더하시는 일이다. 나는 이제 그리 한정한다. 괜한 말, 느닷없는 어떤 정에 이끌리다보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먼저 누구를 찾지 않고 뭐라 새로운 인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것은 틀림없이 마음을 빼앗기게 하나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마음은 주의 인도하심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내 안에 스민 본성은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게 돼 있다. 내 것이 아닌 것이고 내가 임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그리 말씀하신 것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곧 이런저런 의지와 결단이 있을 때이다.
굳이 그때에 우리의 목마름을 알게 하신 이유가 무얼까? 아내는 저녁을 먹으며 누구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가? 하고 대학 때 자기 과 친구를 내게 물었다. 나 또한 모든 인연을 끊고 사는 것과 다를 게 없어서 달리 찾을 길이 없다고 하니, 새삼 나이가 들면서 누가 궁금하고 그때가 그리운 것이라 말하였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로 소망을 두게 하심은 뒤에 남기고 온 것들에 대하여가 아니라 장차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것이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이 마음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8:16).”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은둔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새삼 안부를 묻는 일에 주의하려는 까닭도 그것이다. 감정이 나서고 서로의 인연을 우선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뒤로 물리기 일쑤다. 십중팔구 안 믿는 자와의 새삼스러운 연결은 더욱이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한참 또 반가움으로 가까워지다 흐지부지 되던가, 밀착됨으로 전에 즐기던 것을 추구하기 쉽다. 안 그럴 것 같은데도 악은 전염이 빠르고 선은 개별적인 것이다. 마치 병은 잘 옮기나 건강은 좀체 옮겨지지 않는다. 느낌으로 전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나는 그래서 오늘 아침에 주시는 말씀으로도 내 것으로 여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는 엄연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를 내게도 들려주심을 나는 확신함으로 시편의 고백으로 내 것을 삼는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6, 28).” 비로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종종 예전의 누구와 연락이 닿아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아찔하다. 그러고 살았던 날을 그리워하기보다 송구하고 민망하여, 오늘의 이와 같이 복됨을 감사하게 된다. 전부를 가지고 하나님 없이 사는 것보다 전부를 잃고 하나님을 얻는 것이 복이다. 시인의 고백도 그러한 게 아닌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
오후 내내 늘어져 있었다. 책상에 좀 앉으면 어디가 자꾸 아팠다.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졸다 깨다 오후를 다 흘려보냈다. 아들은 밥만 먹고 공부하러 교회로 갔고 딸애도 피로한지 약을 먹고 쉬었다. 코로나 덕분에 어디를 갈 수 없으니 아내는 좀이 쑤셔서 괜히 여기저기 집안일을 들쑤시며 부산을 떨었다. 이 모두가 나른하였고, 나는 그대로 두었다, 간혹 누구를 생각하다 저의 카톡이 들어왔을 때 어떤 답을 생각하다 놓아두었다. 언제부턴가 새삼스러운 일에는 종종 주저하게 된다. 하나님이 새롭게 더하시는 관계는 자연스럽다. 나는 억지로 무엇을 하려하지 않음으로 조용히 놓아두는 것을 배우는 중이다. 더욱이 사람 관계에 있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먼저 연락을 잘 안 한다. 오가는 빈말에서 소진되는 마음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뜬금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감정에 이끌리게 돼 있다.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라 아니 건드린 것만 못한 게 태반이다. 그래서도 주를 더욱 바란다는 게 가끔은 희한하다. 나의 이런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할 게 없어서 책을 읽고 성경을 붙들고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기도는 지혜의 영을 달라는 것이고 이는 말씀을 보다 더 알고 싶어서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도한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었다는 다산의 시간이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필사적으로 새벽 시간을 사수하고, 묵상글을 쓰고, 아침에 교회로 간다.
이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암벽에 매달려 있는 산악인을 연상한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할 게 없어서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아침에 쓰는 묵상글을 사랑한다. 낮에 언제라도 다시 열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좋다. 교회에 올라가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삶은 계란과 두유로 아침을 먹는다. 고혈압 약을 먹고 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365일 나의 동선은 일정하고 그 시간도 그러해서 보안장치에 찍히는 시간이나 매일 일정한 간격에 주인은 종종 놀라워한다. 몰랐는데 저가 주인이라 경계와 해제가 알림으로 저에게 알려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의 한 날 한 날을 외줄에 매달린 암벽으로 연상하곤 한다. 다른 길이 없고 그리고 가려는 마음도 없다. 일과의 처음이 다시 또 묵상글을 읽으며 교정하고 그걸 또 메모하는 일이다. 그러면 해가 뜨고 창가에 온기가 든다. 새로 도착한 로이드 존스의 요한복음 3장을 읽고, 외상외과 이국종의 기록도 간간히 읽는다. 읽어야 할 여러 책이 대기 중인데 손은 자꾸 설교집으로 간다. 오전은 틈새 없이 꽉 차고, 그러는 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는 사무실들의 고요가 평안하다.
그랬던 것처럼 새해 첫 날은 다를 게 없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그러할 수 있는 데 감사한다. 하루, 또 이렇게 부여하시는 날로 나는 만족하였다. 이와 같은 마음이 성령으로 인한 만족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그러므로 누구를 찾지 않고 어디를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하다. 전에처럼 감정에 끌려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어서 복이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며 누가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새삼 그 어떤 인연도 내 인생에 뭐 그리 대단한 위로와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때뿐이다. 좋을 때뿐이다. 다 그런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한결같으시다. 내가 엉터리로, 어설프고 한심하게 군다 해도 말씀은 여전히 내 편이셨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 사람도 돈도 건강도 어떤 보람도 다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118:6).” 고로 확신한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하는 말씀이 내게도 들려지는 날들이기를.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더는 누구를 그리워하고 부러워할 게 없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 이로 인해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비록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오늘 이 아침에도 주께 붙들린 손으로 안도하며,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