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복음 4:19-20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다. 성령이 이끄신 일이다. 40일을 금식하셨다. 배고픔에 대해, 먹고 사는 문제로 사탄은 공략한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를 물리셨다. 시험은 성전 꼭대기로 이끈다. 뛰어 내리라. 영광을 회유한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6).”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아시는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7).” 다음은 높은 산으로 이끌어 천하만국을 보이며 세상 영광을 보이고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 성공과 출세를 장담한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10).” 이는 예수께서 직접 시험을 당하신 것과 우리가 오늘날 당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 배고픔의 문제와 영적인 안위와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문제들로 갈등하고 어지럽게 한다. 시험 당하실 분이 아니신데 시험을 당하심은 우리로 그 본을 보이심이다.
우리도 어림없다. 그리하여 기도뿐이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그러나 그 시험은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미쁘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는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면 이길 수 있다는 상투적인 소리가 아니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우리가 시험을 당하나 담대하라. 이미 우리 주 예수께서 이기시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13).” 그리고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셨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이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19-20).” 이를 오늘 시편으로 정의하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모든 게 주의 것이다.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된다는 일은,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시 18:33-34).” 주가 이루시는 일에 감복할 따름이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35).” 이를 알 때,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주의 길은 어려운 멍에를 매는 게 아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이처럼 흘러가듯 말씀을 따라 주시는 대로 정리하며 묵상하는 일은 때로 신기할 정도로 연관이 된다. 미리 생각한 것도 메모한 것을 옮겨오는 일도 아닌데.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게 우리로 주를 따르게 하심이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그러할 때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의지로나 선택으로가 아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 이를 저들의 결단으로 이해할 수 없다. 현실 도피로 비춰지는 문제이기는 하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 생업을 포기하고 부모에 대한 예를 다하지 못하는 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23). 표적을 보고 쉽게 믿고 따르는 사람과 차원이 다른(25), 이끌림이다(24).
말씀은 종종 불가사의하다. 우리의 이성과 판단으로 감당이 안 된다. 그런 걸 상식과 세상 기준으로 접근하려드니 내적갈등은 쉼이 없고 외적갈등으로 괴롭다. 우리는 이상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미 6:6).” 당장 배고픔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운데도, 보장하는 영광과 권세도 마다하면서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7).” 주가 보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이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겸손히 주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보면 무모하고 현실도피 같고 타당하지 못한 판단으로 비춰진다. 그런데 보면 이 모든 게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를 묵상하면 달리 보인다. 저는 선생으로 사는 자이다. 상류층이고 지도자다. 그런 그가 신중하였고 이름도 없는 목수의 아들, 무식한 어부들과 어울리는 몽상가를 찾아갔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저의 고백은 되새길수록 놀랍다. 저의 판단이나 지식일 수 없다. ‘그가 밤에’ 왔다는 데서 남을 의식한 까닭이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거면 오히려 낮에 사람들 앞에서 그리 찾아와 견주듯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해석은 아닐 것 같고 오히려 신중함이고 자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음을 알게 한다. 겸손으로다. 가난하고 이름 없는 젊은이에게 저는 주저없이 ‘랍비여’ 하고 부른다. 존경을 담아 선생으로 높임이다. 저가 선생으로 남을 주도하며 가르치는 위치라는 사실에서 더욱 그의 부름은 새롭다. 무엇보다 저는 바로 알았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앞서 예수의 표적을 보고 쉽게 믿는 부류의 사람이 있고, 신중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판단으로 뜻을 굽혀 주 앞에 나아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거듭남과 회심, 결단과 새사람은 동시적인 일이다. 회심만 있고 거듭남이 없는 경우는 박제된 짐승과 같다. 위용은 있으나 생명은 없다. 결단은 하고 새 삶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저는 잘해야 위선자다. 니고데모는 평생을 선생으로 지도자로 사람들을 주도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되묻는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순진할 정도로 진실하다. 그 다음의 말씀은 결정타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님을! 선택도 결단도 의지도 모두 주시는 이가 하게 하셔야 할 수 있는 것으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이 모든 되는 일이 성령으로다. 막내동생이 오늘 첫 예배를 드린다. 여전히 새로운 사역지를 찾고, 여태도 부교역자로 사역하였으나 ‘어쩌다 보니’ 옥상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린다. 나는 이렇게 되는 일이 생경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저는 아직도 개척에 대한 뜻을 정하지 못하고는 있으나 내 안에 주시는 마음은 이미 이루어졌다. 성령으로다. 저의 임의로가 아니다. 오랜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이런 용도로 저렇게 이렇게 손을 대던 것이 어엿한 예배처소로 만들어졌고 새해 첫 주일 예배를 것도 코로나 이 와중에 시작하게 하심이다. 맨 정신으로 이 일이 가능하겠나? 갈급함이 그 속에 있고,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저들을 붙들어 세우신다. 스스로의 자가당착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 앞에 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니고데모는 스승이었다. 여전히 남을 가르치며 주도적으로 저들을 이끄는 사람이다. 그런 자가 일개 목수의 아들을 찾아와 영생을 논한다? 저가 찾아온 밤 시간은 신중함과 진지함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주저함이나 남의 이목을 의식해서가 아니다. 이를 바울의 관점으로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나는 오늘 막내 동생의 첫 예배에 그리 생각을 모은다.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 나는 내가 한 게 아니다. 소위 말하는 준비도 없었고, 마음의 결단도 없었다. 얼떨결에 글방에서의 첫 예배가 오늘에 이르러 주의 교회가 되고 예배의 처소로 삼으신 것이니, 나로 거기에 두신 것도 내가 주도하고 계획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를 폄하하고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겨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시 74:12).”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13).” 그 어떤 것도 주께서 주관하시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6-17).” 이를 알 때 오늘의 우연 같은, 이 사소한 일상을 위해 주께서 행하신 일을 보라! 글방으로 교회되게 하시려고 10여년의 시간을 굴리셨다. 앞서도 10여년의 시간을 집집마다 다니며 황폐한 영혼들을 마주하고, 그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셨다. 나는 선생으로 살며 내가 주도하는 것이라 여겼던 날들이 실은 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주는 결코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21).”
그리하여 오늘도 일하신다. 우리는 이제 주께만 아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