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태복음 14:30-32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세례요한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따로 계시고 싶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마 14:1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연과 사정을 안고, 주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모여들었다. 저들을 물리치시지 않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고 자들의 배고픔을 채우셨다. 어쨌든 주를 향한 마음으로 간절할 수 있다는 것은 기회이다.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따로 제자들을 재촉하시고 배에 태워 건너편 게네사렛 땅으로 가게 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고 이때에 예수께서는 물 위로 걸어오셨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주님께 향해 물 위로 내려선다. 그러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저의 의도는 좋았으나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그래도 주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면서도 저를 이끌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0-32).”
말씀을 대하면서 여러 생각과 기억들이 오간다. 사람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위로를 얻는다. 어제는 연말정산을 위한 기부금영수증을 만들어 필요한 이에게 주었다. 한 친구는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 13년째 꾸준히 후원을 한다. 누구는 이제 막 얼마라도 보내며 적은 금액으로 오히려 미안해한다. 그게 어찌 나를 보고 주는 것이겠나? 그것들이 모여 교회와 사택 임대료를 해결하고 있다. 그 일로 모처럼 누구와 연락을 했다. 좋은 소식은 작은 딸애가 어디 대학에 수시합격으로 붙었다는 것이고 안 좋은 소식은 장모가 유방암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출근길에 잠깐 오간 대화여서 더는 길게 묻지 않았고 잠시 인생의 희로애락을 생각하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물음처럼 나는 요즘 자주 이와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진다. 전에 같으면 이런저런 사연에 호응하고 말을 더하고 보태는 일로 마음을 기울였겠으나 이제는 굳이 안 그래도 될 것이라 여겨졌다. 그런들 푸념뿐이라 입바른 위로가 전부인데, 간략한 사연으로도 나는 메모를 해서 붙이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 시편의 간곡한 어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다른 무엇으로 살겠나?
다들 그 사연이 뒤엉겨 힘들어하면서도 누구는 그래서 주를 바라고 누구는 그래서 더욱 세상을 좇는다. 우리 구원의 궁극은 즉각적이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려 하심이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목적의 첫 관문은 우리의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하심이다. 이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17).”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그 사랑 가운데 뿌리가 굳어지는 것이 두 번째다. 이로써 주의 사랑을 알고,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 이를 깨달아 우리 안에 더욱 충만하게 하시려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 즉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고 우리 형편과 사정이 또한 어떠하다 해도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더더욱 충만하심으로 우리는 산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목표이다.
붙여둔 메모지마다 사연들이 가득하다. 바람에 무서워 물에 빠져간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한 심정으로 남의 것이나 내 것이나 우리의 어려움을 두고 바란다.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즉시로 손을 내밀어 잡아주시며 ‘믿음이 적다.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는 함께 배에 오르신다. 이때도 보면 비록 넘실거리는 물을 보고 무서워하다 빠졌으나 풍랑이 일어 더 빨리 갈 수 있었고, 그 가운데서 주를 간절히 찾음으로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주께 아뢰어 자신도 물 위로 걸어들 수 있었다. 우리 인생의 고달픈 현실이 결코 괜한 게 아닌 것이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 13:23).”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요즘은 아주 직접적으로 이와 같은 증거를 체험하며 산다. 간발의 차이로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멈췄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다 눈발이 예사롭지 않아 돌아오자 폭설이 쏟아졌다. 교회도 그렇고 월세를 밀려야 하나, 하고 있을 때 맞춤하니 예비하신 손길로 채우셨다. 이렇게 지엽적인 연관을 주의하지만 그때마다 주의 도우심을 체험한다. 즉시로 손을 내밀어 잡아주시는 것이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이 몸도 여러 상황도 모두 곧 접어야 하는 일시적인 장막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곧 우리에게 부는 어떤 바람도 주께 더 가까이 그리고 빨리 나아가게 한다. 바람으로 시달리지만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물을 밟고 선다. 금세 또 물에 빠질 테지만 그때마다 즉시로 손을 내밀어 함께 배에 오르시는 주님이 곁에 계시다. 우리가 살 영원한 삶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공간의 의미로 어떤 화려한 물질의 세계를 연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아주 간헐적이고 지엽적이지만 나의 체험을 나는 소중히 여긴다. 이를 대입시켜 누구를 설득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경험 또한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느니 통회와 자복이 지혜였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주가 나와 함께 하시는 자리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주를 바랄 때이다. 그래서 누가 무슨 사연을 말할 때 이제는 전에처럼 같이 흔들리며 슬퍼하고 어쩌나? 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 잊지 않으려 메모지에 적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로써 주를 사모하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한 번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면 결코 다른 증거를 바라지 않게 된다. 그 좋아하던 친구들? 저들과의 즐거웠던 시간들? 함께 추구하고 보람을 느끼곤 하였던 일들? 이는 모두 장막과 같아서 일시적이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 23:3).” 그럼 그럴수록 더욱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사는 게 간절한 일이어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6).” 때론 이것으로 족한 줄 알겠으나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맛보는 것으로 더 나은 바람을 얻는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나는 그래서 종종 안타깝고 안쓰럽다. 모 교회는 대면예배를 순교로 부상시켜, 당국의 방역활동을 박해라고 규정하면서 코로나 확진자가 속출하는데도 감행한다. 같은 교단에서도 저들의 무모함을 지탄하고 정죄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저들의 간절함에 안타깝다. 무슨 선교단체의 허무맹랑한 주장에서도 이를 뭐라 규정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그만큼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된다. 이 와중에도 보따리를 싸서 며칠씩 합숙을 하며 집회를 강행하는 저들의 간절함은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떠나 주의 옷자락이나마 만짐으로 나음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마음이 저리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주께서 복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게 아닌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저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참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심령들도 주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으려는 위인들을 증오하지만 그런 곳으로 보따리를 들고 쓸려 다니는 상한 심령들의 간절함에 대하여는 애곡한다.
진리의 기본 전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렇다면 오늘의 그 어떤 바람도 우리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이를 알 때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무엇이 옳으니 그르니 논박할 것도 없다. 저들은 어쩌니 저쩌니 논할 것도 안 된다. 누구의 사연을 들으며 그 푸념에 서로가 함몰될 게 아니다. 이는 모두 지나가는 바람 같고, 잠시 머물다 가는 장막 같을 뿐이다. 열에 아홉은 어떻게 좀 먹고 사는 문제로,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오늘의 고통을 덜어볼까 하여 ‘주의 옷자락이나마 만지려고’ 기를 쓰고 모여드는 것이겠으나 이 모든 권세는 주의 것이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연연해할 가치가 없는 것은 기어이 저것들로 주의 발 앞에 무릎 꿇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 10:13).”
다만 우리는 주를 바람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 84:3-4).” 그러므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 비록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6).” 이와 같이 주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다른 것에 더는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하는 고백이 내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고로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