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자는 복이 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주신 날의 이런저런 모양이 고로 주를 따르게 하심이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의 자세를 돌아보게 된다(마 16:24-25). 곧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일이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리하여 죽기 전에도 영생을 사는 사람으로의 복이다. 삶이 어떠하다 해도 오직 주만을 의뢰하는 삶이라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내 안에도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게 된다.
늘 같은 날이 반복인 것 같으나 그 안에 여러 갈래의 묵상과 실패와 감사와 좌절이 한데 있었다.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오시는 관계로 설교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런 주간은 마치 한 주가 헐렁한 것처럼 헐거워 느슨하였다. 아이는 또 무엇을 충동구매하고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렸고, 나는 더 이상 뭐라 하는 게 의미가 없는 듯하여 그러려니 하였다. 날이 풀리면서 미세먼지가 극성이었다. 점심때면 동네를 서성거리듯 산책을 하였다. 심신이 피곤한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구석에서 담배를 몰아피우는 젊은 애들이 여럿이었다.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말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를 되새기며 거리를 거닐고 사람들을 보는 일은 저마다의 교훈이 더했다. 다들 사느라 기를 쓰고 사는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면서 스스로를 자신하는 듯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표정을 보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이의 바쁜 걸음을 비껴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시는 말씀을 묵상했다.
과연 이 일은 일상으로 더는 저기에 있지 않음으로 저기를 지켜볼 수 있고, 이제는 여기에 있음으로 그 의미와 역할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나의 지난날이 나로 하여금 이 일을 이해하게 한다. 특히 요즘 여자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담배를 피우고 서슴지 않고 막말을 일삼으며 침을 뱉어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억눌린 자아의 소멸이 그녀의 발끝에 몽글몽글 뱉어낸 침 자국처럼 더럽게 구슬프다. 어제는 아주 어린 아이가 여러 명의 남자애들 사이에 둘러서서 씨발, 씨발, 말끝마다 욕을 해대며 연신 담배를 빨아댔다. 하필 그 아이들 사이로 지나게 되는 셈이어서 얼핏 들은 말속에서 원망과 불안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말씀 앞에서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치 나와 같아서, 호기롭게 한 무리에 끼려고 유난을 떨며 살아야 했던 날들이 연상되었고 그때의 고달픔이 너무 늦어서야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저들을 가르며 길을 지나다 우연처럼 마주친 얼굴과 그 불안하고 부산하였던 말소리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주님! 하고 저들의 영혼을 위해 안타까움으로 불러야 했던 이름 때문이었다. 한 번은 여인이 물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곧 주를 더욱 바람이란, 일상의 소소한 자리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예배였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길을 걷다, 또는 누구와 통화하다, 혼자 가만히 창밖을 보다, 주님! 하고 부르게 되는 외마디 부름이, 그 마음이 ‘예배하는’ 것이겠구나. 저절로 누구를 두고 마음이 가고 주께 아뢰는 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실은 아들과 같이 있으면서 나의 마음은 더욱 주를 바라는 데 간절하여진다.
저의 말없음과 열심이 나를 애태운다. 다 그런 나이라 해도 그 속에 있을 서러움이나 어떤 조바심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마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의식을 하고, 의식을 함으로 싫든 좋든 아이를 분석하게 되고, ‘그래서 그렇겠구나!’ 하는 것을 알 때면 미안함과 동시에 주께 아뢰는 일이 같이 일어난다. 요즘은 부쩍 ‘주께 맡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훈련하는 것 같다. 연애하는 사람처럼 혼자 속을 끓이다 그런들, 그게 아이에게 무엇으로 유익할까? 하여 기도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누군들 그 마음이 상처가 없으며 어떤 응어리진 기억이 없이 살겠나? 나 또한 그것으로 무장하여 젊음을 지났고, 길거리에서 보았던 여자아이의 객쩍은 너스레와 허세를 기억하는 것은 그게 나였다. 그런저런 상처면 상처로 원망이면 원망으로 이제는 주를 더욱 바라고 바라게 되었으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성령으로밖에는 살 수가 없는 삶이 되었다. 아들애 때문에 마음이 어려워서 혼자 쩔쩔매다가도 치닫는 마음을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일로써였다.
누가 전화를 하여 자신의 이런저런 일들 때문인가. 고질적인 허리통증으로 며칠을 고생하였다. 그러는 동안 우울해하다 공연히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그래놓고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고 이를 풀고자 하여 전화를 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 자책이 기도일 수는 없으나 자책으로 기도하게 하심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또 한다. 또 하고 있는 자신으로 환멸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의 연약함이다. 주가 다 아신다. 성령이 나로 한탄해하며 기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를 알게 하는 것은 우리의 약함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4:13).” 전에는 그 약함을 만회하려 기를 쓰고 ‘~척’ 하고 살았다면 이제는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전에는 감추고 또는 기를 쓰고 극복하려 했던 나의 약함이 오히려 이제는 자랑이 되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한다. 말끝마다 씨발 씨발하며 마른 침을 뱉어대고 담배를 길게 품어내던 여자아이도 언젠가는 주의 이 깊고도 넓으신 사랑을 깨닫고 알 수 있기를. 아픈 아이의 병적인 충동구매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로 주를 바라고, 누구의 건강염려증이 자신의 몸을 돌보듯 주를 바라는 데 소용되기를.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단호하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우리가 받은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구원은 확실하고 단회적이나 이는 자라가고 성장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 누구를 비난하고 뭐라 나무라기 전에 나의 나 된 것을 돌아보게 하시는 게 그래서였다.
저마다 표적을 구하나 주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암시하신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시며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이런 건 잘도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음을 꾸짖으신다. 그리고는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함께 머물지 못하는 것의 비애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내 안에 이런 증세가 왜 없겠나? 예전에는 두드러졌던 것이 이제는 더 은밀하여져서 누구를 평가하고 다스리려 드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 우리에게 주가 물으신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남들이 뭐라 하는 거 말고, 나는 주를 어찌 알고 있는가? 그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이 내 것이기를(16). 이를 알게 하심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이와 같은 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비록 자주 쓰러지고 넘어지나,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
누구를 생각하고 무슨 일로 주님, 하고 부를 때 이를 사사로이 여길 게 아니다. 성령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나의 부름은 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신다. 길가를 스치다 젊은이들의 막말과 그 틈바구니에서 한 여자아이를 기억하며, 또는 우리와 같이 가게 하시는 ‘아픈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아들애를 늘 마음에 두고 있다가, 나의 연약함으로 ‘주님!’ 하고 부를 때의 나의 부름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계시는 일이었다.’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일이었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면서 묵중한 사명이었다. 곧 나의 ‘주님’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는 단초였고 약속이었다. 일을 푸는 시작점은 언제나 주님! 하고 부를 때부터이다.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시 83:16).” 이는 결국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3).” 세상에서 온갖 것들이 우리를 주장하고 주관하려 해도,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그러하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러할 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오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이와 같이 주를 위하여 나의 목숨을 잃는 일에까지도,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