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봉석 2021. 1. 16. 06:13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27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편 87:5

 

 

세상은 교회를 싫어한다. 교회가 박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국이 방역을 이유로 교회의 대면 예배를 위협하는 일은 엄연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전염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몇몇 교회를 비롯하여 집단 감염이 지속되고 있다. 방역 당국이 이를 빌미로 교회를 탄압하는지, 아닌지. 그러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길 게 아니다. 누가 전화를 해서 물었다. 자신의 교회 목사님이 너무(?) 정부에 대해 욕하며 편파적으로 어쩐다 하면서 비판하시는 게 듣기 거북하다는 소리였다.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말씀에서 보이시는 예수님의 직접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26)” 저들이 어떤 의도로, 실제 탄압과 박해가 엄연하다 해도 ‘그들조차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세를 내게 하셨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마 17:24).”

 

이를 시편의 축약된 표현으로 가져오면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우리가 나서서 대적하고 욕하고 같이 대대거릴 문제가 아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나는 두 쪽의 상극을 보게 된다. 하나는 황홀경에 빠져 자신들만의 세계를 맛보았을 때의 문제와 다른 하나는 너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먼저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변화하여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무아지경의 경험이었겠나?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 하며 좋아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

 

남다른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를 가지면 착각하게 돼 있다. 그 심정은 이해가 된다. 자신이 각별하여 그 특별한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저들을 이끌어 그 좋고 좋은 산을 내려오신다. 다시 또 지긋지긋한 현실을 살게 하신다. 신앙이 각별하다, 돈독하다, 남다르다 하는 데는 다소 위험이 있다. 자칫 자기 세계에 빠지는 것이다. 환상을 보고 독특한 체험을 하고 각별한 은사를 가졌을 때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를 이끌어 현실로 돌려보내신다. 그것도 첫 만남이 귀신들린 자였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5).” 아, 이 지겨운 일상의 허접함이 나름 만끽하여 황홀감에 취해 있고 싶은데 찬물을 끼얹는 것 같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자기들끼리 구축하는 견고한 세계를 경계하신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건설해야 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태에서 몇몇 교회의 대응과 저들의 호소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나 그들이 취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같이 욕을 하고 대적하느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감언이설을 일삼으면 복음이 서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에 본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25).”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7).” 원수도 사랑하라 하시는데, 당국을 대적하고 위정자를 적으로 돌려서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심지어 가짜 정보를 설교 중에 뇌까리고, 선동하고, 거짓으로 대응하는 요령까지 조직적으로 알려서 응수하는 일 자체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물론 대면예배가 아닌 비대면예배로 인해 성도들의 예배에 대한 해이함과 안이함을 우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먼저 교회가 각성해야 할 일이다. 다들 떠먹여줘야 하고 혼자서는 숟가락도 들지 못하는 미숙아로 만든 게 교회 아닌가? 전화한 누구네 교회도 규모가 있어 일명 ‘쪼개기 대면예배’를 강행하면서 교회 내 각 방에 20명씩 나누어 모니터로 예배를 드리게 한다. 어쨌든 편법적으로 그리 행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자기들끼리 황홀경에 젖어 있는 것도 경계하시지만 세상적인 것에 쓸데없이 대응하는 것도 막으신다. 드러나는 일부 교회의 강경대응은 성도들을 볼모로 교회에 권세 잡은 자의 독단과 아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수치를 통해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은 주를 찾아야 한다.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시 84:16).” 나는 이 말씀이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을 두고 하는 기도로 들린다. 정권이 어떻고 당국이 어떻고 하는 소리는 매 정국 때마다 되풀이 하는 소리다. 교회 탄압이니 박해니 하는 것은 본래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당연한 일로 받아야지 이를 나서서 교회가 적대시하는 일은 문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직접 제지하시고 계심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시며 기꺼이 순응으로 응하신다. 마침 누구의 전화도 있었고, 저의 교회가 어찌 대처하고, 당국에 대해 뭐라 욕하는(?) 것도 들었고, 그걸 내가 같이 뭐라 하지 않았던 것을 오늘 아침 말씀은 일거에 상기시키신다. 지나치게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쏠리는 것에 대해 경계하심을 말이다. 지금은 ‘변화산’에서 초막을 짓고 우리들끼리 알콩달콩 사는 시절이 아니다. 이 땅에서 그와 같은 낭만을 도모하느라 수도원을 건립하고, 저마다의 세계에 심취하여 별장 같은 수련원을 두고 사는 구실이라니.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현실 저잣거리로 이끌어 내리신다. 

 

현실은 어쩔 수 없는 난장의 세계다. 귀신들려 미쳐 날뛰는 자를 만나야 하고, 언제든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거는 세력에게 둘러싸여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고 헐뜯는 소리에 수치를 느끼며 주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이를 타개하려는 듯 교회가 나서서 정부를 비난하고 서로 고소하고 고발하는 꼴불견을 보면서, 아! 이 씨름은 혈과 육에 있지 않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를 응수하는 길은 영적으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씀으로 자신들이 바로 세워져야지, 광화문으로 뛰쳐나가고 정부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면 도리어 돌아와야 할 무리가 이를 보고 치를 떤다. 성령으로 산다는 게 무슨 황홀경에 젖어 사는 게 아니다. 왁자지껄 온갖 소문과 소문, 난리가 난리가 끊이지 않는 일상에서 무던함이다. 자신도 긴가민가 할 정도로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감사요, 기쁨이다. 우리 마음에 두시는 감사를 우리는 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지금이 그럴 시국인가? 그런 형편에서 이상하게 우리 안에는 기쁨이 있다.

 

변화산을 경험하고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했던 베드로는 훗날에 이와 같이 설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그것을 우리는 안다. 이를 조바심내지 않는 것은 하늘에 간직하셨음이다. 그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고작 비대면예배를 운운하고 그래서 교회를 가지 않으니까 예배도 소홀히 여긴다는 정도이면, 교회가 각성하고 회개해야 할 일이다. 누구처럼 주일 예배보다 금요철야에 가서 실컷 울며 기도하고 오는 게 더 좋다는 소릴 버젓이 하는 성도의 수준이라니! 황홀경을 원한다면 클럽도 괜찮고 요즘 애들 말처럼 코인노래방도 나쁘지 않다. 열창을 하고 땀에 흠뻑 젖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은, 그래도 일요일에 한 번 잘 차려 입고 교회를 다녀와야 뭔가 하는 것 같은 정도라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우리는 어떠하든 화평을 누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는 그 안에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증거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지금 이 상황에서 어찌 즐거워할 수 있겠나? 한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우리 안에 소망을 두셨기 때문이다. 하늘에 간직하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을 안다. 영생이란 이토록 앎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하다면 오늘 이 하루도 영생의 날에 포함되는 하루다. 죽어서나 맞이하게 되는 천국이 아니다. 친구의 감사가 나로 감사하게 한다. 저의 찬송이 나로 찬양하게 한다. 우리의 교통함이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인함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주시고 부활 승천하는 그 모든 이유는 하나다. 이를 위하여,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이는 내가 이룬 게 아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죽어라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종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따위의 말로 복음을 가려서는 안 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유난을 떨고 지나치게 의를 추구하고 선을 도모하며 극성을 부리는 데는 영락없다.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애쓴다. 애쓰려니 적도 많고 대적하는 이도 많아 저들이 실족하든 말든 자신들의 거대한 왕국을 세워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우리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를 위해 저들의 공격도 박해도 모진 세상살이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건설하신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우리는 그 안에서 감사와 찬송뿐이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6).” 그러므로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