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태복음 21:16-17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 91:14
일상에서 주를 바라지 않으면 소용없다. 말씀이 아무리 귀하고 존귀하나 주의 말씀으로 일상을 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이르셨다. 무리는 저를 선지자로 안다.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 21:11).” 예수는 물으신 바 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대답하였다(16:15, 16).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이 엊그제였다(17, 18). 누구는 들어서 알고 누구는 일상을 삶으로 안다. ‘~대해 아는 것’과 ‘~을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일상을 움직이지 못하는 말씀은 글자에 불과하고 그 영혼을 흔들지 못하는 성령은 그저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 우리의 일상과 하늘의 일은 맞닿아 있다. 내가 오늘 매는 일이 하늘에서도 매이고 오늘을 푸는 일이 하늘에도 풀린다.
괜찮을 줄 알았다. 출근 시간을 비껴 평소 잘 아는 길에 있어, 휴대전화 이어폰이 고장난 것을 서비스센터로 직접 가면 무료로 교체해 준다는 소리에 일찍 서둘렀다. 그런데 교차로 진입 과정에서 출근길 끝물의 차량들이 한데 뒤엉켜 신호등이 바뀌는데도 속수무책이 되었다. 순간 나의 불안은 발동하였고, 폐소공포증으로 숨을 쉴 수 없고 식은땀이 흐르고 온 몸은 경직되었다. 연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 기를 썼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어 죽을 것만 같았다. 고작 그 시각이 5분 남짓? 죽을 것처럼 나는 숨을 몰아쉬고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에 함몰되었다. 간신히 그 길을 벗어나고 몇 번의 신호등마다 엄습하던 공포와 달리 채 영업시간 전에 도착한 터라, 일처리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은 상대적으로 수월하였다. 교회 안에 들어가자 모든 게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였다. 기진하여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째 조금씩 보던 <미안해요, 리키>라는 영화의 남은 부분을 보다 엉엉 울었다. 실직한 가장이 택배 일을 하고, 그의 아내는 요양사로 일하고 사춘기 아들과 초등과정의 딸애를 둔 평범하고 궁핍한 가정의 이야기다. 저들 대화 가운데,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는 말에 퍽, 하고 울음이 터졌다. 누구나 저의 일상은 녹록하지 않고, 그 가운데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의문은 번번이 ‘따귀 맞은 영혼’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마치 잠깐 잊고 있던 나의 나 된 것을 확인하는 하루였고, 그것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의 삶을 엿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겨레 기사 가운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사진기자는 서울역의 출근 풍경을 담으려고 나갔다가 한 노숙자에게 자신의 옷과 장갑을 벗어주고 가는 어느 직장인의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저가 돌아선 뒤 기자가 달려가 노숙자에게 묻자, 너무 추워서 따뜻한 커피 한 잔만 뽑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저는 입고 있던 점퍼와 장갑을 벗어주고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도 건네고 갔다는 거였다. 우습게도 그와 같은 내용을 보다가도 퍽, 하고 울음이 터져 나도 모르게 주님, 하고 길게 신음하듯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누구는 무슨 선거철만 되면 나타나서 보란 듯이 봉사를 하고 헌신을 본보기로 삼아 표를 구걸한다. 영락없이 이번에도 또 누가 청문회를 앞두고 숨겨진 날들이 들춰지면서 탈세와 편법적인 누락, 위장전입 따위의 사실들이 연일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앞서 저들의 입바른 소리가 역겨운 까닭은 실상 저들의 일상과 맥을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의 뜻이 고상하고 신념이 고결한들, 그의 일상과 무관하다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누구의 어려운 소식과 힘든 사연을 듣고 주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나의 사소한 일상에서 주를 바라는 일이 얼마나 더 실제적이고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해준다. 어제는 그렇게 자주 울었고, 울컥하다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루룩 흐르는 눈물이 낯설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주의 이름을 되뇌며 확인하는 일이란, 일상이 주는 선물이다. 말씀도 일상에서의 일이고 주의 구원도 일상에서의 실제다. 그것이 이상이나 신념이 되어 떠도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으면 일상은 허사고 신앙은 낭만일 뿐이다. 아니면 현재의 나로 그와 같은 찬양은 실제의 것으로 드려질 수가 없다. 저들, 고위공직자들이야 그렇다쳐도 오늘을 사는 우리 일상은 매 끼니마다 호소하듯 부른다. 나는 오늘 말씀을 그렇게 듣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 21:16-17).”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은 오해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재고 따지고 묻지 않고 저마다 주를 송축하였다. 이를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거슬렸을 테고, 저들의 입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찬미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천국의 비밀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온전한 고백으로 두신 것을 이 아침 말씀은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를 문제 삼고 시빗거리로 일삼으려 드는 자들을 떠나 예수님은 성 밖 베다니에 가셨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의심과 논쟁이 들끓고, 자신이 좀 안다고 여기는 말씀과 알량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의 신앙을 붙들고 사는지를 일깨우신다. 일상, 그 현장에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면 무엇도 소용이 없다.
종종 나는 어제와 같은 일을 겪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나의 나 된 것에 대한 감사가 새롭다. 물론 피로감과 함께 서글픈 마음이 나를 흔들려고 하지만 그럴 때면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하시는 마음도 동시에 더하신다. 아니면 그 영화의 한 대목처럼 ‘사는 게 참 너무 힘들다!’ 또는 어느 사진기자의 사진 한 장에 울컥, 하고 눈물이 흐르면서 사는 게 다들 너무 처절하기만 하다. 나는 눈물지으며 ‘아, 주님!’ 하고 서글퍼 주의 이름을 부르다 주의 은혜가 더없이 필요하고 귀한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하는 사도의 음성에도 번쩍하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러자면 나의 몸을 주께 드리는 길밖에 없다(13). 내가 나로 알아서 살겠다는 것보다 처절하고 비참한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 오늘 시편의 말씀도 그리 묵상하고 그리 되새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나로 주를 더 사랑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 안에 역사하시는 이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려는 거였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눈물겹도록 사는 게 너무 힘든 세상에서, 종종 웃기도 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지만 이는 모두 찰나와 같고 너무 금세 지나가버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6-18).” 그리하여 우리의 영원은 일상의 일상을 딛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무던히 한 날을 딛고 사는 가운데서 뻗어나간다. 아,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5:21).” 오후께는 정신을 가다듬고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나의 하루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자주 긴장을 하여 그런가, 소파에 잠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가 하루가 지났다. 혼자 울어 눈이 퍽퍽한 하루였다. 말씀은 여전히 나를 붙드신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46:10).” 하시는 말씀을 오래도록 입에 머금고 있다.
어떤 일로 또는 누구의 문제로 마음이 시달리다가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하시는 말씀 앞에서 함구한다. 우리가 느끼는 것의 태반이 걱정인데,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는 무장해제 당한다. 염려를 맡기는 수밖에. 여느 때보다 안정제를 더 먹은 하루였지만 괜한 서러움보다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 혼자 울렁거리며 우울해하기보다 해야 할 것을 무던히 참고 견디면서, 설교원고 초안을 끌어당겨 정리하고 누구를 생각하다, 내 주제에 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리 하게 하시는 이의 손길이라, 나는 나로 나의 약함을 사랑하게 하시는 이의 강권하심을 느끼고는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는 주를 사랑하고 주를 사랑함으로 누구를 생각한다.
여느 사람보다 긴장하고 예민하게 산다는 일은 참 피로하다. 실제 이런저런 어려움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기도 구차스러운 것들이어서… 그러니 그런 것에 일일이 끌려 다니다 보면 정작 나의 감사는 사라지기 일쑤여서 그만둔다. 사는 데 따른 고단함이야 누군들 아니 그렇겠나? 오늘에 이르러 오히려 그것으로 나로 나의 오만함을 누르게 하시는 이의 손길을 느낀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런데 여전히,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 본질상 어쩔 수 없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은혜로 산다. 오늘에 이루어진 나의 일상은 하나부터 열까지 은혜 아닌 것이 없다. 나는 그리 알고 또한 믿는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정작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죽었던 나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그러니 오늘의 나는 다르다.
더는 기웃거리지 않게 하시려고, 전에 즐기고 도움을 구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오늘의 이런저런 일들이 나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심이다. 그것은 오늘 시편의 표현과도 같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1-3).”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나? 이를 앎으로 나의 앎은 일상을 초월하지 않고 무던하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산다. 주어진 한 날의 시간이 보태지고 포개져서 영원을 이루어간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9-11).” 아, 이와 같은 같은 날들이 나의 찬미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