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태복음 27:42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편 97:10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너무도 저항 없이 붙들리셨다. 저를 팔았던 유다는 가책에 견딜 수 없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희롱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42).” 정말로 그리하셨더라면 어땠을까? 오늘 우리의 구원은 없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았다. 왠지 모를 서러움과 어떤 자책이 밀려든다. 저 <십자가의 도>가 누구에게는 미련하고, 누구에게는 껄끄럽고, 누구에게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저마다 ‘누구’에 속한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여러 군상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되묻게 하신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3-24).” 저마다의 입장과 처지와 그 상황에 따라 판단을 달리한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그러므로 십자가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반대 세력은 가만있지 못한다. 결박하고 희롱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있어 십자가는 필연적이다. 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모든 나라와 인류를 위해 죽으신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하여’ 계획적으로 그리하셨다.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일로써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니 오늘 날 일련의 교회들을 보며 ‘적당히 좀 믿어라!’ 하는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 저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단시비 여부와도 상관없이 교회는 여전히 교회이다. 믿는 자의 구원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적당한 것을 찾아 종교화하고 희석시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에 십자가 밑의 여러 사람들의 모습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거 보면 ‘적당히 믿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충만함을 더하며 믿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이를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물세례로 그친 성도가 있고,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가 있다. 이는 세례요한의 증언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셰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저의 판단은 정확했다. 단지 세례는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다.
이때에 세례요한의 증언은 놀랍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이와 같은 받음, 대답은 저의 제자들이 예수께로 사람들이 더 몰리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며,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한 말에 대한 요한의 대답이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8).” 저는 정직하였고 순수하였다. 그와 같은 자신의 입장을 신랑의 친구로 충분하다는 겸손도 겸비하였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다시 말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것을 확실히 한다. 고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결하며 성숙한 고백인가? 우리는 쇠하여야 하고 주의 십자가의 보혈, 구원의 하나님은 날로 흥하여야 한다!
이를 가리켜 심령이 가난한 자일 테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을 연상케 된다(마 5:3-6). 곧 자신은 충만하지 못한 것을 아는 자이다. 스스로는 어떤 경우로도 충만할 수 없다. 저는 그래서 자신의 신분과 입장을 바로 알고 있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물론 저는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만족하였고 전적으로 순응하였다. 저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큰 일,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25).” 그러나 그 일을 아는 것과 실제의 누림은 다른 것인가. 저가 감옥에 갇혔다. 감옥 안에서 예수의 행하심을 전해들었고, 자신이 있던 그이가 맞나? 흔들리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 이는 어쩌면 당연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처지에서의 의문이다.
예수님은 이를 들으시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6).” 그리고 뒤이어 저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는 누구도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말씀이다. 저의 행적과 믿음을 두고 하시는,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로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 무슨 말씀일까? 저가 이 땅에서 행하고 믿고 따르며 추구하였던 신앙이면 그 어떤 자보다 크고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며, 천국에 가보면 저의 그러했던 수고? 헌신? 희생은 다만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작을 따름이다. 곧 천국의 어떤 작은 자보다 저의 행적이 크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 곧 이와 같은 의문은 세례 요한이 전한 말 중에도 있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1).” 즉 '성령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크지 않다.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있고, 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도 있다.
한 생을 사는 데 있어, 심지어는 가까운 훗날 천국에서도 이 둘은 구분된다. 세례 요한 때부터 천국은 침노 당한다. 바라고 원하는 자의 소유다. 이 땅에서의 추구와 갈구함으로 그치는 물세례로는 딱 그만큼의 정도로만 누리고 느낄 따름이다. 이를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 있고 장성한 사람의 수준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즉 세례 요한은 훌륭하여서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에 가장 큰 자였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아주 작은 자도 저보다 크다. 저로써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고로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으로 바라고 구하며, 그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하며 힘에 부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엄연히 다른 점은 그런 차이다. 누가 더 큰 자인가? 하는 따위의 가름이 아니다. 어린아이도 엄연한 사람이고 생명이고 나름의 누림이 있다. 저도 만족함으로 산다. 그러나 장성하여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더는 공갈젖꼭지로 만족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더 충만한 충만함을 바라고 누리고 추구하게 된다.
아브라함도 이를 명확히 모르고 갔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구약의 선지자들은 물론 시편의 기자들도 흐릿하니 막연하였던 것을 붙들고 씨름하며 살아야 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저들은 연구하여서 그때마다 간신히 아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흐릿하고 막연하던 진리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12).” 곧 오늘 우리의 ‘은혜 위에 은혜’는 저들의 것과 비교가 안 된다. 우리의 ‘충만함’에 대하여는 저들도 감히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구약의 저들은 여러 모양으로 근근이 알고 살아야 했다.
오늘 우리, 신약을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임하셨고, 성령으로 사는 삶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게 개방되었고 계시되어서 더는 가려진 세계가 없다. 이 모든 세계를 한눈에 보게, 말씀을 주셨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저들은 그렇듯 율법이라는 초등 교사로 초등학문을 삼아 머무는 정도로만 알고 믿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곧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4:3).” 그와 같은 믿음으로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에 머물지 않고 자라가야 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
아! 그와 같은 구분은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곧 오늘 본문의 <십자가의 도>를 보편적인 인류애로 희석시켜버리면 곤란하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에 대한 지칭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 우리의 앎이 관념이나 추상, 이념이 아니고 실제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곧 말씀을 받고 이를 ‘내 이야기-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아는 것이 복이다. 그렇게 주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보혜사 성령을 날 위해 주셨으며, 성령 충만으로 살기를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실제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초보적인 수준으로만 알고 예수를 구주로 섬기며 따랐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내려오라 외치는 사람들, 그리하면 믿겠다고 외치는 자들의 함성도 결국 그 이상의 수준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결국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이다. 이 십자가의 도는 누구에게는 어떻든 우리에게는 부활이다. 성령이 임하시는 길이다. 오늘 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전전긍긍, 합숙을 하고, 성경공부에 열을 올리고, 목숨을 걸듯이 애써 수고하여 이루려는 구원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놓여나야 한다. 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행위로 목적을 삼게 하는 무리를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얕은 물에 갇혀 비참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세례 요함이 감옥에 갇혔을 때 드러내는 회의나 갈등도, 오늘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오고 난감한 현실이 부딪치면 드는 의심과 좌절도… 그렇게 지각이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운지.그러니 나는 어떠한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장성한 자로 살아가고 있나?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못하면 영락없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이 땅의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수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가를 되돌아본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 육신의 일로 쩔쩔매면서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97:7).” 우리는 오히려 주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8).” 왜냐하면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9).” 그러므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10).” 그렇게 주께서 오늘도 나를 향하여,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11).” 그러므로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