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전봉석 2021. 1. 27. 06:14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복음 28:16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8:9

 

 

예수 다시 사셨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 그 앞에 있으면서도 의심할 일이다. 누구는 부러 거짓을 퍼뜨리고,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13-14).” 누구에게는 끝까지 ‘그럴 수 없는 일’이어야 한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15).” 이를 상식으로 또는 우리의 어떤 지식으로 받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5).”

 

그때마다 각자의 이해로 끌어들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6-7).” 이 모든 이루심을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 저가 우리 죄를 지셨고,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를 알아보는 것과 그 믿음이 확장하여 성령으로 내주임재하게 하시는 일이 다르다. 끝내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모른다 하던 베드로 역시 이내 ‘양자의 영’을 받지 않았으면 의심하고, 모의하고, 이를 거짓으로 바꾸는 자와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는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없고 자의적으로 누릴 수 없다. 성령이 하시고,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리하여 상속자로 고난도 달게 받게 하신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6, 17).”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다만 내 안에 이는 어떤 앎이 저절로 보게 하고 듣게 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이를 말로 증명하기는 어려워도 일상으로 경험한다. ‘어쩌다 이런 일이…’ 하고 염려하고 마음을 어렵게 하던 것들이 가까운 훗날에 주가 이루시는 선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그 무엇도 이를 우리 안의 확신에서 도려낼 수 없다. 외려 확장하고 더욱 넓고 견고하여지는 믿음을 누린다. 이를 ‘우리가 알거니와’ 아,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보다 더 놀랍고 신비하며, 감당할 수 없이 벅차고 희한한 마음을 어찌 말로다 증명할 수 있겠나? 그야말로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데 어째서 홍시 맛이 나냐고 물으면 뭐라 말할 수 있겠나?’

 

그러니 주의 자녀이면서 그저 어린아이에 머물며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 장성하여서 더는 그런 문제를 문제로도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려 하는 일보다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여전히 염려와 근심으로 그때마다 의심하고 나아가 모의하여 거짓으로 꾸며 보태거나 빼는 경우라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고! 종종 뉴스에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교회 사업’이 거론될 때면 마음이 안 좋다. 누구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누구는 보육원을, 학원을, 해외 선교를 무슨 사업처럼 확장하는 일에 대하여… 솔직히 뭐라 하기가 좀 그렇다. 어쨌든 이문을 남겨 더 크게 확장하고 사업을 넓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더해져야 하는 ‘보이는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기독교 정신, 말씀 중심 어쩌고 하는 말은 붙지만 실제는 남다른 영재 교육을 표방하고 사람들의 우월주의를 상품화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결론은 우리가 나서서 이룰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지나치게’ 그러하면 모든 게 변질될 수밖에 없다. 지혜자는 일찍이 이를 알고 가르친 바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저마다 내 자식은 특별하고 뭔가 남다른 교육을 선호하는 것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겠으나,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또한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6-17).” 앞에 ‘지나치게’를 강조하신 까닭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이사를 하고, 위장전입도 하고, 합숙도 하고, 남다른 교육을 일구려고 하는 것들에 대하여,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냉정하게 돌아보면 ‘내가 어찌 좀 해보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관여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느라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살다, 훗날에 이를 마치 자식들을 위한 희생이었던 것처럼 억울해하고. 성경의 이치는 간단하기만 한 것을,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그걸 어떻게든 미연에 방지하겠다고 또는 개선하여 반드시 새롭게 하겠다고 이를 사명감으로 알고 사는 자기 열심에 대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결국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일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태만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그래서 스스로 나서면? 이런저런 사업을 구상하던 이가 학원 일에 뛰어들어 몇 년 사이에 비인가 기독교 대안학교를 전국 체인점 규모로 운영한다고 하니, 그 수완도 대단하지만 그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의 열광을 나는 그리 선하다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나쁘다 좋다의 의미가 아니라, 과연 그러한 일을 성령이 이루신 것이라 볼 수 있겠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세례요한은 이를 알았지만 정작 쇠하여 갈 때는 의심이 들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알 수 없는 일이겠으니 내가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에 다들 제도권 밖의 교육을 불사하면서도 이내 제도권 안으로 진입하려 드는 아이러니한 열심이 반복된다.

 

우리는 엄연히 그 이상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가 다시 사셨다. 누구는 끝내 부정해야 하고, 거짓으로 꾸며서라도 이를 은폐하고 다른 의도로 재생산해야 하지만 우리는 결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이를 뒤에서 ‘신성한 성품’이라 규정하였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런저런 그럴듯한 이유를 빼고, 솔직히 정욕 때문에 세상에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수단이 된 것은 아닌가? 신앙 교육을 운운하면서도 엄청난 학벌의 교사들을 채용하고, 영어로만 수업하고, 글로벌시대에 맞는 인재양성을 모토로 한 해에 엄청난 교육비를 투자하며 별의별 현장에 아이들을 내모는 게 아닌가? 과연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는 데 드는 부대비용이 이처럼 엄청난가? 그래서 이룬 특출한 신앙이고 실력이고 학벌로 저들이 장성하여 벌이는 ‘하나님의 사업’은 온당할까?

 

이번 코로나 사태로 속속들이 드러나는 교회 현장을 보면서 나는 놀라워하곤 한다. 그것이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교리적인 측면은 차치하고, 그렇게들 젊은이들이 몰리고, 어린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확산 재생산되듯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장한 데는… 감히 말하지만 사탄의 역사가 엄청나다. 저는 어찌나 ‘광명의 천사’로 우리를 미혹하는지,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모르겠나, 나는. 다들 선한 의도를 들먹이고 하나님의 일을 운운하며 덤비는 일이라, 일일이 판단하고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선한 사업을 하는 이들이 있고,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살리려고, 또는 낙후된 삶의 질을 향상하고자 세계 방방곡곡 제삼구역을 돌며 집을 짓고, 교육을 하고, 생필품을 보내고… 사람들의 선한 의도를 끌어 모아 하나님의 사업을 운영한다고 하니! 저마다의 관점과 시각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전에는 선한 의도로 확장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면 모든 게 선하다고 여겼으나 과연 우리 자체가 그만큼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인가?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하고 돌보며 신앙으로 헌신하던 목사가 지적장애아동을 성추행하고, 저들을 착취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제도권 안에서 악용하여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얻기 위해 얼마든지 편법을 동원하기도 하는 것이었으니! 모 단체장으로 있는 목사는 대여섯 명의 위탁아동을 건사하면서 국가와 지자체로부터 일인당 얼마씩의 보조를 받고 있다. 목사 신분으로는 어려워지자 가족 중에 복지사자격증을 가지고 온 일가가 이 일로 밥벌이를 한다. 저의 강의 중에 대놓고 한 말이다. 여느 중견기업의 간부보다 더 벌이가 된다는 말에 기암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듯 자신을 믿을 만하게 여길 정도로 자신하는가? 왜 예수님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지 알겠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묵상을 하게 된다. 예수 다시 사셨다. 이를 대하는 여러 군상의 무리가 저마다의 관점으로 이를 처리한다. 누구는 두려움으로 주저하고, 누구는 거짓으로 꾸며 자신들의 살 궁리와 정치적으로 유리한 방향을 모색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운운하며 누구는 돈벌이로 삼고 이를 명예나 자부심으로 견주며 확장한다. 이상하게도 그런 데는 사람들이 몰리고 돈벌이가 된다. 한 해에 수백 수천만 원의 교육비를 지불하며 무슨 영재학교로 보내고, 남다른 신앙 교육과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일념으로 사람들이 몰려가고 모아들인다.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것에 승부수를 띄우는 무슨 도박장 같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저들을 지켜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달리 더하거나 빼는 일에 있어 모든 것이 우리를 유혹한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모르겠다. 나는 자꾸 두려움이 앞설 따름이다. 오늘 날은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삼키는 시대이다. 스스로의 열심으로 자긍하고 자부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독려한다.

 

이에 오늘 시편은 엄히 경고하시는 것 같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