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가복음 5:33-34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편 103:7
권능을 행하시는 주와 이를 받는 당사자는 안다. 아무리 인파가 몰리고, 곁에서 같이 하는 제자들도 알지 못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에서 권능이 나감을 아셨고, 여자는 그의 권능으로 나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3-34).” 이는 매우 독특하고 희한한 일이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 103:7).” 이에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0).”
우리의 지혜는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한다. 앞서 나의 소망 없음을 나는 실토한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고 구제불능의 나 자신을 대한다. 가령 평소에 혼자서 어디 차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겁에 질려 피하는 사람이 요즘 아내의 운전연습을 도와주고 있다. 아이들과 하게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아내에 대해서는 미덥지가 않다. 이제는 딸애도 제법 운전을 하는데, 그렇다고 애들한테 맡기지 못하고 내가 곁에 앉아 동네를 같이 돈다. 그러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긴장하고 언성을 높이고 급기야 화를 낸다. 그리고는 또 염치없고 혐오스러워하고, 다신 같이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안탄다고 했다가도 내가 아니면 또 안 될 것 같고…. 그럴 때면 나는 구제불능인 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내가 그리는 내 모습이나 언사를 그려보지만 나는 또 어김없이 긴장하고 잔소리하다 욕을 하고 화를 낸다. 그런데도 아내는 싫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3-14).” 가끔은 내게 붙이신 그이가 아내가 아닌가 싶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는 묘연하다. 보다 인자하고 의연하며, 그 마음은 평안하고 온화하기를 바라지만 번번이 나는 나의 실상 앞에서 좌절한다.
아,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5).” 이는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16-17).” … 말씀을 되뇌며 소망을 갖지만 그만큼 또 좌절을 느끼고는 하는 것이다. 언제쯤 장성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불안과 조급함과 안달과 혼자 서러워하는 수준에서 벗어날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런 거 보면 천성이 나는 억지스럽고 구제불능인 것 같다. 그러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부디 나는 죽어야 내가 산다. 누구 뭐랄 거 없고, 어떤 일에 대하여 판단하고 비난할 수 없다. 누구보다 그게 나 자신이라 나 같은 이가 어찌 누구더러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나.
주일 오후는 그렇게 또 무너졌고 번번이 나는 속수무책인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다. 예배에 앞서 일찍 오는 ‘아픈 아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는데, 대부분 아이에게 뭐라 이르는 말이 실은 다 내가 들어야 할 소리다. 나 또한 어쩌지 못하는 문제들이다. 번번이 그와 같은 사실 앞에 나는 내가 누구더러 문제라 하고 '저런 사람'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이는 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지 못한다. 맥락이 닿지 않는 아이의 말과 감정의 변화는 당혹스럽다. 그렇게 자신의 이상에서 겉돈다. 한동안 철도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며 적잖은 돈을 들여 참고서를 구입하고 들떠하더니, 한 달도 안 돼 벌써 시들하여졌다. 어제는 뜬금없이 우쿨렐레를 배우기로 했다며 악기를 산 곳으로 레슨을 받으러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의 반응이 시들하였고 아이는 그게 서운한지 눈치를 보았다. 나는 뭐라 격려하고 응원하며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부턴가는 ‘또?’ 하는 지겨움이 먼저 든다. 앞서 유튜브를 제작한다며 꽤 큰 금액의 장비를 구입하고 한동안 빠졌었고, 어느 날은 무슨 렌즈를 사서 눈에 끼고 한두 번 사용하다 말고, 옷이며 뭐며, 아이의 충동구매는 병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솔직히 ‘아픈 아이’여서 저 애만 그런가? 실은 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린 뭐 그리 대단했던가? 뭐라 말을 하다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어서 나는 몰래 민망한 것이다.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서도 다르지 않다. 나의 어쩔 수 없음이 항상 나를 먼저 곧추세운다. 나는 나의 죄를 혐오한다. 내가 세상을 운운하고 누구를 탓하고 가증스럽게 여겨 저를 정죄하는 일에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찔린다. 나의 이와 같은 내적인 갈등은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저들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다고? 이를 항상 일깨우는 것이 말씀이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아니면 내가 갇혀 사는 영혼으로 나의 가증함과 가소로움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업신여기며 나로 괄시한다. 그런 나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신 그 은혜, 그 사랑이 아니면 나야말로 구제불능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명랑하였고 아이는 밝있다. 아내는 늘 헌신적이며 아이는 나를 싫어라 하지 않아주었다. 그게 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뭐라 싫은 소리를 듣고도 아이는 나를 깍듯이 목사로 대우하며 위하고 따르니 나야말로 면목이 없는 것이다. 이런 걸 신랑이라고 같이 의지하고 살아주니 아내 아내 앞에 나는 면목이 없는 것이다. 뭐가 좋은지 저들은 실실거리며 즐거워하는데, 나는 혼자서 불편하고 미안하여 나의 나 된 것에 환멸을 느끼는 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이로써 나는 절망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누구는 나의 겉만 보고 좋게 여길 수는 있겠으나 나는 주의 권능이 아니면 멈추지 않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과 다를 게 없이 수치스럽다. 나의 초라함을 그대로 가지고 말씀 앞에 선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내 죄가 나로 얼마나 끔찍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나는 주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고자 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곧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나의 이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나는 무너지고, 나의 무너짐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어리석고 수치스러움을 아시면서도 말씀은 주만 붙들게 하신다. 아니면 살 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허기와 갈증으로 목말라한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보잘것없는 나를 충만하게 하심으로 나로 은혜 위에 은혜로 살게 하신다.
예수님 곁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언동을 보며 나를 찾는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듯 나는 늘 죽은 것들 사이에서 버벅거리고,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죽어가는 딸을 위해 구하듯 주를 구한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처럼 나는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야겠다. 그럼 나음을 입을 것이라 믿고, 그리하였을 때 저는 자신의 ‘혈루 근원이 곧’ 마름을 알았듯이 아는 이 아침에 묵상을 쓰며 나를 토로하고 주의 위로와 치유를 느낀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아시는 것처럼 말씀은 온통 내 얘기다. 회당장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떠들며 예수를 조롱하나, 나는 이제 그것이 불편하다. 주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신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이 모든 게 숨김이 없이 다 드러나는 일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저마다의 소원과 고달픔에도 누구는 이를 모르고 살지만 나는 알고자 원한다. 누구는 현세의 문제로, 무덤 사이에 머무나 나는 거기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서로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은 아시고, 받는 자도 안다. 이에 대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아무리 일생이 그러하다 하여,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그럼에도 이를 안고 주께 나오는 것이 복되었다. 자조 섞인 마음으로 하는 소리지만 나의 이와 같은 구제불능인 자신에 대해서도 주께 아뢰는 일,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저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살겠다. 그러할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울컥,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이런 일이 늘 반복되고 또 그럴 게 뻔하지만 나의 나 된 것에 대해 내가 이제 그것까지도 주께 내어드린다. 이에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0).” 이처럼 주 앞에 앉게 하심으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 그렇게 나를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 아,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11).” 오늘도 그저 면목이 없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 앞에 앉아 염치없게도 다시 또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이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2-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