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마가복음 6:8-9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요구하고 바라는 것은 줄고 감사와 찬송이 늘어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목이 베여 죽었다. 그의 제자들은 예수로 인해 자신들이 위축되는 것 같아,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그러자 요한이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7).” 하고 가르쳤다. 즉 우리는 신랑이 아니고 그의 친구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하는 저의 고백이 귀하다. 저마다 자신들이 흥하고 교회는 쇠하고, 군중들로부터 자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은 멀리하려 드는 이 시국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하는 고백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시며 이르실 때, 나는 오늘 말씀을 되새기게 된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8-9).” 내 것을 요구하고 바라고 취하려 드는 것은 어린아이 적의 일로 족하다. 기도를 할 때도 나의 바람과 요구는 점점 줄고 주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이 느는 것이 정상이다.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날들이지만 그래서 이것저것 바라고 구하는 기도제목으로 가득하다면 그 신앙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정도였다. 아이는 요구하는 게 많고 그것을 들어주는 것으로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장성하여 믿음의 분량이 자란다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관심에서 서서히 ‘쇠하여’지는 것과 같이 너무 애쓰지 않는다. 건강에 대해, 필요한 무엇에 대해, 나를 위한 기도는 줄어든다.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며, 이를 위해 자신은 쇠하여진다. 어제는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 중에 자아에 대한 애착도 쇠하여진다. 누가 뭐라 하는 말에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두둔하지 않는 것으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니지!’ 하는 기분 상함을 대수로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전에 같으면 열등감, 열패감, 모욕, 상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행여 누가 나를 동정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에 치를 떨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살았다. 악착같이 저들 무리에 속하였고, 기를 쓰고 저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때론 간 쓸개를 다 빼주는 일이 있어도, 나는 저들에게서 인정받고 존귀함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오늘 시편의 여러 구절 가운데 이 구절의 말씀이 나의 남은 생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그래서 치열하였다. 치졸하였고 치사하게도 빌붙어 살았다. 온갖 ‘나를 위한 것’을 위하여 애쓰면 애쓸수록 이상하게도, 마치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번번이 조그만 일에도 욱, 하고 치미는 울분과 서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1:4).” 그러할 때 첫 번째로 나타나는 증상은 맡은 것에 충일하게 된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두 번째로는 남의 판단에 개의치 않게 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3).” 세 번째로는 스스로도 자책하지 않는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 결론은 나를 심판하실 이가 따로 계심을 잘 안다. 이를 바로 알 때 진국의 고백과 삶의 자세가 나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의지로 나는 할 수 없다. 다만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며 바람은 있다. 주께 구하게 되는 간구도 그리 바뀌어졌다. 전에는 요구가 많고 가족들 ‘내 것’에 필요를 따라 기도가 가득하였다면 이제는 감사와 찬송이 늘고 송구하고 염치없는 마음이 늘어간다.
교회의 과업이 무얼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요즘 부쩍 사회로부터 교회가 욕을 먹고, 그러는데도 정권을 적대시하고 사람들의 외면과 환멸을 핍박으로 여기는 무리가 있다. 어느 조사에 보면 76%의 국민이 교회에 실망하고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사 밑에 달리는 댓글을 차마 보기 민망하여 닫고는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데도 정치화된 세력은 이를 진영논리로 가져가 자기 세력을 과시한다. 우리의 다름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먼저는 자신과의 씨름에서 번번이 지니까, 분별력도 없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저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였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란 허망할 정도로 들린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 소리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곧 세례 요한만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데 따른 정의다. 내가 외친 말의 수확을 얻어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연사로 사는 게 아니다. 어느 목사의 한 번 설교가 얼마고, 어디에서 강의하고 받는 사례가 얼마라는 소리에 기겁을 한다. 사람들이 모이고 저들을 선동함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일에 있어,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시는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신은 흥하여야 하겠고 저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은 쇠하여야 하리라.’ 오늘의 현상은 거꾸로 흘러가는 게 아닐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어쩌자고 교회 강단에 태극기를 걸고 말끝마다 정권을 비난하고 쟁점화 시켜 자신들을 흥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나를 돌아보게 하심이 귀하였다. 지금은 세상을 개탄스러워하고 누구를 뭐라 할 때가 아니라, 자신을 근신시켜 깨어 있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싸우는 방식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육신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실 것이다. 우리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덩달아 정치에 휘말리면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데 답을 해야 하고, 거기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바라고 요구하는 기도가 온통 자신들의 필요다. 감사보다 요구를, 찬송보다는 필요를 채우려 바라는 것으로 기도가 꽉 찬다. 물론 우리는 방어적으로 두렵고 떨리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도 분명히 해야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나의 건강과 위신, 우리 가족의 평안과 만족을 위해 기도하게 돼 있으나 점점 이러한 마음은 쇠하여지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위하여 구하고 바라는 기도의 삶이 되어간다. 이런 우리의 말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이를 위해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우리로 이 땅에서 천하무적으로 부르신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4).” 사람들이 뭐라 하든, 저들이 추구하고 바라고 요구하는 게 어떻든지 ‘나는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그러할 때 우리의 승리는 기정사실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그러니 그러한가, 돌아볼 수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5-16).”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으나 최소한 주를 사랑하고 의뢰하는 삶이라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이것이 나의 고백이고 목적이고 생의 전부여야 하지 않을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시 10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