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전봉석 2021. 2. 3. 06:02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마가복음 7:24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편 105:3

 

 

한 번 은혜를 받고 마는 게 아니다. 믿고 중생함으로 끝난 게 아니다. 여전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오늘도 오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 사회가 교회를 욕한다고 같이 욕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만큼 삶의 영광, 은혜를 보여주지 못한 까닭이다. 충만함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의무이고 권리이다. 이를 변변하지 못하게 처신함으로 오늘의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어느 댓글에서, ‘5인 이상 사적인 모인 금지’에 따른 설 명절 직계 가족들조차 만나지 못하는 사태를 두고, ‘교회로 가면 되겠네?’ 하고 비아냥거렸다. 저들 인식에 교회 모임이 사적인 게 되었다. 공적인 것으로 인정하기에는 사적으로 이를 행사하고 휘두르는 모습이 저들 눈에 가시가 된 것이다. 이에 교회는 덩달아서 변명하고 발끈할 게 아니다.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경고를 들어야 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스스로들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다. 자신의 믿음을 믿음으로 이 사태가 벌어졌고, 자신들 예배를 예배함으로 이 상황이 되었다. 예배가 예배될 때 우상숭배가 되고, 믿음을 믿을 때 신념이 된다. 그 자신을 충분하다고 여기면 더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바라지 않는다. 충분한데 뭘 더 구할 은혜가 있겠나? 이미 받은 것으로 족한 줄 알 때 더는 은혜가 생성되지 못한다. 스스로 모든 것에서 곤고하다고 느끼고 가련함을 알고 가난한 심령으로 자신이 눈 먼 것을 알아야 벌거벗고 있는 몰골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에도 저것에도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겼으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이보다 더 끔찍한 경우가 또 있을까? 어느 훗날에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악한 종아!’ 하시면 더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오금이 저린다. 지금 이 땅에서야 뭔 짓을 했다 한들 돌이킬 수 있고, 용서를 구할 수 있으나 그때에는 더는 돌이킬 수가 없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25:30).” 그러니 자신의 충분함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바라지 않고, 한낱 오늘의 지지와 응원을 은혜로 여겨 됐다싶어 하는 자의 결과는 끔찍하다. 이에 바울 사도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면 오늘 내게 더하시는 ‘가시’로 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을 깨닫게 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좀 우스운 꼴이지만, 명절이 다가오고 어디 또 가야 한다는 것에 벌써부터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설사를 하고 뭘 먹으면 괜히 어지럽고 별 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명절은 법적으로 그리 정하였고, 그래서 우리도 각자 화상으로 같이 예배드리고 세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긴장이 풀렸다. 그런 거 보면 내가 나로 사는 게 때론 참 고달프다. 운전면허를 딴 아내는 자꾸 운전을 하고 싶어 하고 나는 혼자 운전하는 게 미덥지가 않아 같이 타기는 타야겠는데 그럴 때마다 온 몸은 경직된다. 아침마다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돌보고 오는 길에 교회에서 집까지 운전을 하게 하는데, 그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어제는 전철 시간을 놓쳤다며 먼저 들어가 아들 깨우고 밥을 차려야 한대서 그럼 그게 날아갈 듯 홀가분한 것이다. 누가 나더러 쯧쯧 혀를 차며 어쩌냐? 하고 비웃는다면 나는 이를 내게 두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로 인함인 것에 동의한다. 좋을 리 있겠나? 오죽하니 역마살이 꼈나? 하고 우스갯소릴 해댈 정도로 어디 싸돌아다니며 낚시 좋아하고, 혼자 그처럼 충분한 줄 알던 사람이니,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나라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나는 이를 매순간 시시로 느끼며 산다.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서고 사람들이 꽉 차게 탔을 때, 신호등 앞에서 누가 쭈뼛거리며 못 가거나 몇 번의 신호를 더 받아야 할 때, 갑자기 울리는 사이렌소리, 오만 것에 병적으로 나의 몸은 긴장하여 수축과 이완을 몇 번씩 되풀이 하느라, 저녁이 되면 온 몸과 마음이 기진하여 쓰러진다. 어제도 아홉 시도 안 돼 비몽사몽 딸애가 퇴근하고 오는 것을 잠결에 들으면서 혼곤하였다. 나의 일련의 ‘몸의 가시’든 ‘사탄의 가시’든 이것으로 나는 나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의 은혜를 느낀다.

 

나야말로 매순간이 은혜가 아니면 견딜 수가 없다. 그런 나를 마귀는 항상 참소한다. 저는 먼저 나의 양심을 찌른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2:2-3).” 목사가 돼서! 누구를 위로하고 오히려 도와야 할 사람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로! 그 안에는 온통 염려가 득실거리니! 하는 식의 자책이 나를 몰아세울 때 나는 우울해지고 열패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주만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라 주 앞에 앉는다. 그런 나를 주님은 변호해주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루에도 몇 번씩 이와 같은 사실을 체험한다. 이 체험이 귀하여, 빼앗기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두셨다.

 

그 결과는 불을 본 듯 분명해진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곧 내 몸의 가시든 뭐든, 나의 긴장과 초조가 나로 하여금 은혜를 더욱 은혜로! 주의 충만하심을 더욱 충만함으로! 바라고 구하게 한다!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만을 찾고 구하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마음에 주의 사랑이 머물지 못하는 까닭이 세상을 사랑할 때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 세상에는 나도 속한다. 나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한, 이보다 더 끔찍한 사랑은 없다. 내가 곧 세상이다. 교회가 교회 스스로 교회가 되면, 이보다 더 사탄이 좋아할 것도 없다. ‘예배가 예배 되고 믿음이 믿음 된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경각심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나로 만족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예레미야의 표현처럼 무궁하신 주의 사랑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요한의 표현처럼 끝까지 함께 하시는 사랑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바울의 고백처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충만함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러므로 나의 오늘의 나는 또 하루, 오늘의 새로운 은혜로만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주님을 숨길 수가 없다. 오늘 본문을 읽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막 7:24).” 나는 이 구절에서 한참을 머물게 되는 이유다. 영적으로 무뎌진 성도보다 비참한 게 더 있을까? 이 난리통에 무덤덤하니, 심지어 교회를 욕한다고 덩달아 욕하며 맞서려 드는, 그저 나는 비통할 따름이다.

 

교회가 욕먹고 하나님이 조롱거리가 되었다. 고작 이 나라가 뭐라고? 지금의 이 정권이 뭐고, 누가 그 권세를 잡은들 어떻다고? 뭐 그리 사사건건 정치의 앞줄에 서서 저러는지!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사 40:15-16).” 고작 통에 한 방울의 물 같이, 저울의 작은 티끌처럼, 섬을 떠도는 먼지 정도도 안 되는 것을 두고! 한 줌 땔감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이리 쏠리고 절리 기웃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 하여금 그러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의 가시’가 내게는 은혜였다. 면구스럽고 민망할 노릇이나 나의 이 고백이 즐거움이 된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우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충분할 수 없다. 주의 충만하심이 아니면 살 길이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4).” 나는 오늘 아침도 말씀에 매달려 하루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여왕이 왕궁에 머물 때 이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듯이 우리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알리며 나부끼는 깃발은 말씀이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기분이 뭣 같다 해도, 오늘도 주의 은혜를 바라며 말씀 앞에 앉는 이유다. 이로 간절하였고 충만하였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시 60:4).” 그리하여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아 2:4).”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셨다. 이에“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105:41-4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