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편 11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절규는 성령이 성자께 외치는 소리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떨어지신 적이 없다.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신 삼위다. 태초에 성부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실 때에도 모두는 함께 하셨다. 단 한 번도 떨어지신 적이 없다. 이를 성령의 절규로 보는 까닭은 성자께서 성부를 향해 외치시는 소리로는 저의 생이 자발적이셨다. 삼위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다.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셨다. 그런데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혹자는 저가 무덤에 들어가 계시던 삼일 동안은 삼위가 떨어져 계셔야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저는 절규하셨고,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37).” 죄의 삯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38).” 곧 막힌 담이 허물어지듯 죽음을 이기셨다. 우리의 죄도 더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는 게 되었다.
죄는 그러하여 죽음뿐이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겔 18:24).” 이를 갈라놓으심으로 더는 죄의 결과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셨다. 여하튼 성자는 죄의 결과를 담당하셨고, 이와 함께 하시던 성령은 절규하시고 성부는 우리로 가로막았던 휘장을 찢으셨다. 이에 합당한 찬송이 오늘 시편의 한 구절로 울리는 듯하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시 113:4).”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면 오늘을 사는 모든 일이 한낱 부스러기만 같다. 훠이, 불려가는 바람 같다. 나의 염려나 근심은 언제나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근거한다. 자아를 보존하는 데 기를 쓰는 근거다. 가령 아이가 전날에 열이 오르고 설사를 여러 번 해댔다고 하더니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전전날에 친구를 만난다고 하더니 뭘 먹었는지, 아이의 소식을 듣고 순간 불안이 엄습하였다. 하필 그 시각에 막내 동생이 잠깐 다녀간다고 오고 있었다. 주일은 어쩌고, 교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염려로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이처럼 염려와 근심이 쉴 새가 없다. 그럴 때면 오늘과 같은 말씀은 나를 붙들어 앉히신다.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 사느라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 수고와 애씀이 하나님께서 가르신 휘장을 도로 봉하여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언제든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상에서 ‘헛된 모습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나의 무뎌지는 마음을 다잡으신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오늘 성경에서도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빌라도가 물었다.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막 15:4).” 저는 자신이 어떤 이를 재판하고, 무슨 일을 결정하게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예수님은 이에 침묵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5).” 도리어 말 없으심이 저로 놀랍게 하였다. 예수님은 침묵으로도 많은 말씀을 전하신다. 상대적으로 주의 백성들이라 자부하던 이들은 시끄럽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3).”
저를 알지 못하는 빌라도는 이 일이 기이하기만 하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14).”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모든 내용은 일관되다. 무슨 문제나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그 해결책은 주를 아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곧 영생으로 통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나는 사느라 사는 동안에 병적으로 불안을 안고 살고 남들보다 약한 육신을 짊어지고 산다. 사느라 고역인 날들인 것 같으나 이를 나는 아주 특별한 은혜로 여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마치 공식과 같아서 주를 알면 알수록 주를 아는 것을 잃을 수 있어 이를 주의하게 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누구는 저에게 맡기시는 자녀로 엄청난 장애를 더하시고, 누구에게는 가난을, 몹쓸 질병을, 늘 수시로 찌르는 어려운 형편과 사정을 ‘주셨으니!’
이로써 누구는 자신을 쳐서 복종하게 하고, 누구는 이내 세상을 원망하며 산다. 어쩜 좋을까, 싶을 정도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더 고달픈 어려움에 시달리고는 하는 것을 본다. 가령 모세는 끝내 주가 맡기시는 사명에 이끌리었다. 애굽을 나온 후 1년 남짓의 광야를 걸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둔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에게 말한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이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전혀 그 의미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그 간격이 무엇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자주 느끼는 생각이지만 어찌하여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그처럼 희롱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인지! 이내 빌라도의 선택은 빌라도다웠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15).” 그리고 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희롱도 저들다웠다(16-19).
지금 이 일이 시시덕거리며 웃고 즐길 일인가? 분간할 수 없는 자들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도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저들은 저들 나름 좋다고 여기고 옳다고 여기는 행위로 그 길을 간다. 그러한 때에도 우연처럼 주께 붙들리는 자도 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것이겠으나 그의 루포는 훗날 바울의 문안을 받는 각별한 사이가 된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계가 오늘의 나를 이끄시며 내 이야기로 전개가 된다. 나의 아버지의 생애를 돌아봐도 저를 부르시고 주의 길을 가게 하시는 데 있어 주의 강권하심은 당혹스러웠고 어질머리가 날 정도로 가혹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 생이 주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종종 어렵고 힘들다가도 그와 같은 어려움으로 안도한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원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 15:43).”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행동이었음은 분명하다. 상당히 민감한 이슈에도 저는 ‘당돌히’ 주저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늘의 자세를 점검한다. 현실적인 문제, 내 문제, 내 이야기, 살아가는 여러 번잡스러운 일들 가운데서 우리는 얼마나 자기 일에 연연해하며 살고 있는지. 모두가 그러할 때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의 바람은 다르다. 달라야 하고 다름으로 같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하는 데서 오늘의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가늠자는 말씀뿐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설교보다 설교문을 작성하는 데 더 은혜가 크고, 누구에게 읽히는 일보다 이처럼 묵상글을 쓰는 데서 감동이 귀하다. 이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최소한 묵상글을 쓰는 만큼씩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설교문을 작성하는 동안에라도 말씀 안에 있을 수 있어 감사하다. 내가 나를 잘 알고 누구보다 나의 어리석음과 못된 성질머리를 아는 고로 주와 붙어 있는 시간이 귀하다. 오늘 본문으로 묵상하며 성자 예수의 입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절규를 가슴에 새긴다. 하나님과 떨어지는 순간보다 참혹한 것은 없다.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가 끊임없이 밀려다닌다 해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오늘 말씀에서 이와 같은 사실 앞에 감읍한다.
이에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13:1).” 하시는 오늘 시편의 한 구절로 충분히 오늘을 사는 이유와 목적을 깨닫는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