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누가복음 4:25-27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118:5
모든 것 가운데 어찌 나인지, 나 같은 죄인 살리려, 처음 사람 아담이 저지른 죄로 전가되었던 우리를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이시고 회복시키셨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저의 직분은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곧 죄가 들어오기 전에 처음 사람 아담에게도 선지자로서의 직분과 제사장이요, 왕 같은 사명이 있었다. 선지자로서 저는 모든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며 저들을 보는 대로 이름을 지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 2:20).” 이는 무조건 갖다 붙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 하나하나 지으신 그 지음에 따르는 선견이었다.
또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1-23).” 저는 잠들어 있었으나 하나님이 하신 일의 취지를 알았고, 단번에 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고 저를 가리켜 여자라 이름하였다. 선지자로서의 직능은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어려 자연 모든 만유를 아는 능력이다. 또한 저에게는 제사장의 직분이 있어 에덴을 자유자재로 다니며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으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렸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외모나 벌거벗음에 대해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주의 영광과 찬송을 향하였다.
또한 왕의 직분으로 저에게 주신 그 땅의 모든 것을 가르쳐 다스리는 권세가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러한 저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 같은 모든 직분은 하나님과의 계약, 곧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신 것에 반하여, 뱀의 유혹에 넘어져 죄에 굴복함으로 그 약속은 파기되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직분은 손실되어, 선지자적인 눈은 어두워져 세상을 보고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가운데 섭리하시는 역사를 알아보지 못한다. 제사장의 사명으로 예배와 경배를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여겨 지독하게 무감각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하는 신분은 상실되어 세상에 종노릇하며 하루하루 허덕거리며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먹으면 죽이리라.’ 하는 계약관계는 실행되어 모든 인류는 죽음을 맞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단순한 사실은 ‘때가 차매’ 이와 같은 관계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에 예수의 직책은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의 직분이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세상을 섬기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실한 마음에는 귀신을 좇는 본능이 남아 있어 툭, 하면 점괘를 보고 운을 바라고 나무나 돌이나 우리를 위해 지으신 것들을 오히려 경배하고 찬양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앞에서 소원을 빌고 머리를 조아린다. 일생을 자신을 숭배하며 자신을 예배하는 제사장이 되었고, 만물에 끌려 다니는 무력하고 나약한 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저들을 불쌍히 여겨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따로따로 두셨다. 구약은 구원자 예수를 기다리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그와 같은 신분을 선포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선지자의 사명으로 저들에게 빛과 소금을 이르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그러나 죄의 결과로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는 자리에 놓여,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선지자적인 직분으로 예수께서 선포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곧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뿐만 아니라, 예수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산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값을 직접 담당하신 것이다. 우리가 저를 죽였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4-15).”
자, 이와 같은 사실을 아무나 듣고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그리 읽는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모두가 같아도 사렙다의 과부 하나의 일이 되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모두가 끔찍한 지경에 처했으나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나음을 입었다(눅 4:25-27). 이는 이와 같은 복음이 아무나의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한 게 아님을 알게 하신다. 그러한 우리의 특권은 뚜렷하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 118:5).” 우리는 주께 부르짖을 권세를 얻었고 하나님은 이에 응답하시고 넓은 곳으로 세우신다.
왜? 처음부터 하나님은 내 편이시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 나의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그러니 내가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랴? 어떤 것에 연연하여 여전히 끌려 다니며 종노릇하듯 살겠나? 그럴 수 없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 우리의 회복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 같은 직분은 믿는 자에게 주신 권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그러므로 말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게 허사다. 세상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문화나 종교나 예술이 모두 헛된 것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숭상한다. 버젓이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온갖 자연 앞에서 소원을 빌며 숭배한다. 사람에게 연연하고 자신의 일에 너무 예민하여져서 산다. 조금만 건드려도 싸우자고 덤비는, 자존심이 그 어떤 우상보다 우위에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저가 회복하신 직분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곧 내가 아침이면 기를 쓰고 일어나 앉아 말씀 앞에 서는 까닭은 ‘그의 힘으로 살며, 기동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저 죽을 날을 향해 나아가는 산 것들의 기로일 뿐이겠나? 다만 이제 나는 ‘그의 소생’이다. 곧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그는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 저마다 신을 믿고 심지어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이는 모르는 자의 소리다. 모두가 과부여도, 모두가 문둥병에 걸렸어도 이에 나음을 얻고 위로를 받는 자는,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통회한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어 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3).” 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다들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고, 그 일 가운데 어떤 특별한 기적과 이적을 바라고 추구하며 살지만… 그러니 그와 같은 삶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그래서 좀 더 남다르게, 멋지게,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한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철학은 남의 다리만 긁는 꼴이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선행과 열심을 다하는 삶은 죽은 자식 어르는 꼴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까닭은 더욱 주를 앎으로 본래의 선지자적인 사명을 다하고 제사장의 직분을 온전히 수행하는 삶으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오늘도 이처럼 나에게 하루를 더하심은 그러하여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