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1:34-36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저마다 마음의 짐을 지고 산다. 나이와 상관없이 풀리지 않은 앙금은 자신의 생을 진저리나게 한다. 그 마음의 죄를 풀어내지 못하면 그 몸의 모난 행실은 사는 날 동안 거치적거린다. 그런 자는 남의 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무심하거나 방심함으로 따라하거나 그 앞에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면 자기 기분, 생각, 느낌, 상태에 따라 그 마음을 요동을 친다. ‘눈은 봄으로 귀는 들음으로 복되다.’ 하시는 말씀에 묵상을 모으게 되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오늘 예수님은 이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이는 몸의 문제 이전에 마음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그 속이 어두운 까닭은 풀리지 않은 문제를 쌓아둔 까닭이다. 그렇듯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눅 11:34-36).
지혜자는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곧 일련의 사건 가운데 ‘학폭’과 관련한 기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였다. 유명한 배구선수들인 ‘쌍둥이 자매’의 학창시절 폭력 기사를 기점으로 새롭게 점화되고 있는 ‘아이돌’이나 배우들의 ‘학폭’ 관련 기사가 연일 화제다. 누구는 잊고 사는 일인데 누구에게는 여전히 상처가 되어 어릴 때 당했던 모욕과 치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에 친구 모친의 장례식엘 갔다. 어릴 적에 저의 집에 자주 놀라갔던 터라, 수십 년 만에 저들 가족을 만나 반가웠다. 그 중에 환갑을 훌쩍 넘긴 큰 누님이 다가와 반가워하였고 더욱이 목사가 되었다는 말에 저도 믿는 이라 친근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주정처럼 자기 어릴 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사경을 헤매는 모친을 붙들고 왜 자신이 초등학교 때 학교에 다녀오면 한 번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나? 하고 거듭 되물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친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고 늙은 누이는 그것이 이내 서러운지 수십 년 만에 만난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듯 ‘그때 그 일’을 늘어놓는 거였다. 이는 그 마음의 응어리이고 원망이나 결국은 시기이다. ‘시기는 그의 뼈를 썩게 한다.’
나는 가해자를 두둔할 생각도 피해자를 동정할 마음도 없다. 그들 말처럼 다들 어렸고, 나름 알량한 권력을 가지고 누군 눌리고 누군 누른 일이다. 실은 나도 잘 안다. 가끔은 지금도 꿈을 꾸다 깰 정도로 왕따니 괴롭힘이니 하는 억울함을 당했다. 놀림은 다반사고 ‘은따’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를 별로 응어리로 남겨두고 살지 않았다. 늘 풀어내고 말하였는데, 그것을 소재로 글을 썼던 것 같다. 특히 고등학교 때 여러 곳에서 상을 받곤 하는데, 나는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마음의 일을 시시콜콜 풀어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아버지의 전투적인 교회 일과 장애로 인한 친구들의 모진 시선과 그때마다 역으로 삐져나오는 나의 쾌활함에 대하여.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엎드리면 엉엉 울면서 이르고 또 이른 사건들이 많았다. 온통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라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것을 나는 하나님께 토설하였고, 이를 글로 썼다. 특히 고등학교 땐 그런 이야기로 상을 받으면서 나의 이야기는 객관화가 되었고 나는 그 이야기의 화자이면서 청중이 되었다. 마치 굳은살처럼, 흉터는 남았으나 아픔은 없다.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단서를 구하면,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다른 데 호소하고 눈을 들어 정작 그들 상대에게 항변한들. 그러했던 저가 잘되는 꼴을 보니 시기는 일고, 자신의 상처는 상대적으로 더욱 커지는 것이어서. 그러니 ‘미투’를 한다 해서, 그리하여 그를 잘나가던 사회에서 매장시켰다고 한들. 또 다른 자책과 억울함은 땀띠처럼 번져나갈 뿐이다. 우리 안의 죄성은 남의 죄를 꼬집어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를 그렇게 응징하였다고 한들. 누구도 승자가 없는 혈투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여기에서 ‘모든 사람’에는 나를 괴롭혔던 이도 포함이 된다. 가만히 돌아보면 당한 만큼 나 역시 앙갚음을 하고 살았다. 저이에게 당했으면 이이에게 풀고 살았고, 이도저도 없으면 자신을 향해 난도질을 하였다. 그것이 성질이 되고 기질이 되어 오늘도 은연중에 가까운 가족을 억압한다. 그러므로 저들과 더불어 ‘화평’하는 것은 주를 보는 눈을 가리지 않기 위함이다. 이는 거룩함의 첫 발이다. 성경은 강조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눅 11:40).”
‘하늘’에 계신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지 못하시겠나?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무난하고 평탄하게 살아온 이는 없다. 다만 평평하여 그 위를 밟고 살아갈 뿐이다. 들춰보면 악취가 나고 그 깊은 곳에는 원망의 백골이 묻혀 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질 리 없고, 덮고 산다고 해서 묻혀질 일들이 아니다. 상대가 만일 유명인이 아니고, 잘된 모양이 없었다면 그저 흘겨 듣고 말하고 말 일을 눈엣가시처럼 생채기를 내는 까닭은 저가 잘돼서이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키울 수 있었겠으며, 어느 자식인들 또한 부모에게서 상처를 안 받고 되갚지 않고 자랄 수 있었겠나. 하물며 부모 자식도 그러한데,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47).” 우리로서 열심히 사는 삶의 흔적은 무덤뿐인 것이다. 일련의 사회 사건에서 또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유난히 덤덤한 나의 속이 이상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나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괴롭힘이 나의 유년에 또는 청소년기에 자행되었다. 그것은 은밀하게 오늘 나의 기질로 고착되었을 터,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는 난제로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 시편의 말씀을 음미하면 이에 그 간절한 심정을 헤아려 풀어낼 수 있는 길이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나의 눈은 다만 하늘을 바라보며 주께 향한다. 하늘은 곧 전능자, 나의 겉과 속을 모두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이시다. 저를 바람은, 마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그러니 그 심정이 어떻겠나? 상전의 손이 쉬어야 내 손도 쉴 텐데, 여주인의 손이 쉬어야 여종의 손도 좀 쉴 텐데…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만큼 저의 주권에 의지할 때 은혜도 더욱 크게 바란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3).” 세상은 아무리 애써도 끝이 없다. 흔히 여기저기서 애정결핍을 운운하는데, 저마다 결핍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그 정도라는 것은 모두가 절대적인 것이어서 누구의 것과 비교하여 대차대조표를 낼 수도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일 뿐이다. 아, 은혜를 베푸소서.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정작 가해를 한 쪽은 피해를 당한 쪽을 잊고 산다 한들, 누구라도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관계다.
자식의 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누가 있다. 들어보면 그 자식을 그리 내 몬 장본인이 저였다. 이를 알면 알수록 은혜로밖에는 답이 없다. 우리가 풀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누가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서두에서 간략하게 정돈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이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하신 내용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 과정의 단서가 된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2)” 무엇보다 먼저는 주의 이름과 거룩을 바라고, 그의 나라가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시게 하는 일이 우선이다. 다음이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3)” 곧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알고 사는 게 복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먼저가 용서고 나중이 사죄다. 사함을 받을 때 용서를 하는 오늘의 형태로는 어림도 없다. 먼저 용서이고 나중이 사함이었다. 우리가 죄를 깨달을 때 용서가 온 것이 아니라, 용서가 이른 것을 나중에서야 알고 죄를 고한다. '죽었던 나를 살리신 뒤의 일이다.' 그러할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4).” 시험에 든다는 것은 마음의 시달림이 어쩌다 그러고 마는 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연거푸 그 자리에 걸려 넘어진다면 문제다. 매번 누구의 눈치를 살핀다면 저가 나의 약한 자리다. 가족일 수 있고 자신일 수도 있다. 학위나 모자람에 대한 열등감일 수 있고 외모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번번이 걸림을 당하면서도 그저 또 평평하게 하고 지나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속적일 때 효력이 있다(5-8). 그러므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굳이 구하게 하시고 애써 찾게 하심은 주님이 몰라서가 아니다. ‘~해달라’고 부르짖던 것이 어느 순간 족한 줄을 알게 하는 마음으로, 그의 간절함이 오히려 주의 이름과 그의 나라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내게 임하옵기를 바라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기도의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이 돌이킴을 받는 일이다.
왜? 이미 주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더하시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1-12).” 아무리 우리가 악한 사람이라 해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 성령으로가 아니면 이 모든 난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려면 자기 속을 먼저 밝혀 그 안을 뒤져야 한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33).” 곧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 그런데도 그저 또 꾹, 누르고 덮고 괜찮다고 안일하게 굴면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날마다 괴롭히는 게 정작 자기 자심이었다. 이에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 이 모든 일의 주관은 주께 있다.
그렇다면 나의 겉보다 속을 먼저 아시는 이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그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곧 성령으로 내게 더하여 주시기를.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