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전봉석 2021. 2. 24. 06:06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누가복음 12:27-2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8

 

 

이것저것 구하기만 하는 영혼은 아직 어리다.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으면, 결코 우리 자신은 쇠하여지지 않는다. 내가 흥함으로 주는 쇠하신다. 자기 자아에 너무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은 그 영혼을 돌보지 못하고, 영혼을 다루지 않으면 버려진 텃밭 같이 무성한 염려들로 쓸모없는 날들이 된다. 더하여 엉겅퀴가 자라나듯 자기애로 무성하다. 스스로 자신을 대접하고 존귀하게 여김으로 자기 문제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이는 씨름이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오늘 말씀은 우리의 관심을 자신에게서 떼어놓는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안이하고 막연하다 당한다.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52-53).” 서로의 갈등은 정해진 것이다.

 

이를 내가 짊어지고 감당할 수 없다. 다투어 이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에서 우리의 염려는 싹이 튼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그 이름, 주께 맡긴다는 것은 무얼까?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눅 12:27-28).” 예수님은 백합화를 예로 드셨다. 저는 심겨진 자리에서 가만히 자신의 생을 다함으로 솔로몬의 영광보다 훌륭하게 피어난다.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 목적은 주를 맞이하려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결코 막연하거나 안이한 생이 아니다. 심겨진 자리가 어떠하든 백합화는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고 꽃을 틔운다. 그렇듯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36).”

 

어제는 두어 달 치 안정제를 받으러 정신과에 갔다. 담당의가 오후 진료라, 기다리는 게 싫어 점심시간에 접수를 하였다. 그동안 밖으로 나와 양지바른 곳에서 친구와 통화를 했다. 믿음의 정도와 상관없이 우리의 염려는 끝도 없다. 마치 아무리 뽑고 솎아도 다시 자라는 잡초 같다. 내남없이 걱정은 가득이다. 그런 우리에게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 왜 주님은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적은 무리여!’ 하고 따로 구분하여 지칭하셨을까? 우리에게 주시는 그의 나라는 기쁨이다. 이를 많은 무리의 공유물로 삼지 않으신다. 이를 알면 알수록 내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줄어간다. 나의 염려로 그 키를 자라게 할 수 없다. 머리털 한 올도 나게 할 수 없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5).” 하다못해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26).” 담당의의 말은 늘 같은 소리여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먼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24).” 하물며 주의 형상으로 지음 바 된 우리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

 

세상이 구하는 것에서 나는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30).” 아버지가 이미 아신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 단지 이 땅에서 어찌 잘되나, 하고 온통 마음을 기울일 게 아니다. 연로하신 부모에 대한 염려, 늘 마음에 걸리는 자녀들에 대한 걱정, 이는 모두 낡아지는 배낭과 같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33).” 그 낡은 가방에 무얼 그리도 쑤셔 넣고, 우겨 넣고 사는지.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 있다. 빼앗길 리 없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하긴, 입만 열면 쏟아내는 말의 출처였다. 생각의 정도이고 마음에 가득한 것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6:45).” 나의 생각은 무엇을 내고 마음은 무엇을 담고 사는지, 입의 열매로 안다.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전 10:12-13).”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이를 부끄러워하고 문제로 인식할 줄 아는 것이 첫 번째요, 도무지 이를 개선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일이 두 번째다. 나로서는 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주제인데 누구를 탓하고 비난하겠나? 오늘 아침,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하는 기본 명제의 말씀을 분명히 되새긴다. 세상에 숨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어차피 드러날 거, 그럼 나는 어떠한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게 참으로 어렵다. 돌아서면 이미 후회뿐이다. 안 해도 될 말만 한 것 같다. 없어도 될 염려만 거듭 되풀이 하며 사는 것 같다.

 

자주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어려웠다. 왜? 하고 누가 물으면 딱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실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 때문이다.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아무런 성과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일상. 한 영혼에 대한 막연한 애착… 그쪽이 문인 줄 알고 다가가면 강한 벽만 느껴질 때. 순식간에 일어나는 나의 나 됨은 불안이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뿐이어서 말씀은 이 “모든 악의를 함께 버리”라고 하신다(엡 4:31). 버려지지 않는 것을 버리려고 하는 일도 고역이다. 순식간의 일이라, 내 안에 악독이 그러했다. 나는 나의 말로 지껄이며 살고 있었다. 평온한 줄 알았는데 악독과 노함이 가득하였다. 답답한 마음은 금세 분냄으로 드러나기 일쑤다. 그럼 그것은 고스란히 남을 비방하는 것으로, 남 탓이 된다. 도무지 그러한 나를 나는 이길 수 없다. 길은 하나뿐이다. 구제불능인 나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붙드는 것,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 어제도 묵상한 것처럼 용서가 먼저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내가 자의로 주를 바라고 구하게 된 것이 아니다. 나의 의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후회하고 통회하였던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버리고, 사모하는 일이다. 버리지는 못하고 사모만 하려니까, 자꾸만 낭만을 꿈꾸거나 억지를 부린다. 그러는 나조차 나보다 나를 더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 안의 억눌린 감정이나 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본성은 자아에 대한 애착이어서, 아닌 척 굴지만 모든 감정은 자기애였다. 그러는 내게 성경은 좌표를 제시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이는 증명의 문제가 아닌 삶의 증거였다. 인위적으로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들풀과 같이 놓아두신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모두는 주의 섭리에서 이루어진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눅 12:6).”

 

그렇듯 작고 미미한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7).” 어찌 비교도 안 될 것 같은 일에서 나는 새삼 나의 이 모든 상황을 받아낸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염려가 엄습하면 속수무책이나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주를 시인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 늘 기본 전제는, 주는 선하시다.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내가 의뢰할 분이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저의 고백을 그리 이해한다. 더는 희망이 없어도 소망을 거두지 않는 것이 믿음이었고 의뢰였다.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시 124:1).”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시다. 곧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54:4).”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124:7).” 고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