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시 45:2).” 하는 말씀으로 하루를 붙들고 있었다. 시어(詩語)는 함축적이어서 단순히 사전적이고 지시적인 의미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왕은 솔로몬이나 다윗을 직접 지칭하는 것일 수 있으나 나 자신으로 이해한다. 우리의 잃어버린 직분,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사명은 회복되었다. 일찍이 처음 사람 아담만이 완전한 사람으로 누리었던 것이다. 저는 에덴에서 하나님의 뜻-모든 생명에 이름을 부여하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였다. 언제 어디서든 주를 경배하고 찬송하며 함께 거하는 예배의 사명자 직분인 제사장의 직을 감당하였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의 사명도 다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으로는 이를 이룰 수 없는 나라였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이룰 수 있는 나라였다. 결국 사탄의 꾐에 넘어갔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으며 그 결과 죽음이 다스리게 되었다. 모든 인류가 잃어버린 세 가지 직분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명으로 각각 개별적인 사람에게 부여되어 간헐적으로 이어져오다 예수께서 이를 복원하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회복되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러나 이와 같은 말씀이 모두의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6).” 아무리 용을 써도 믿지 못하는 자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7-8).” 저들의 넘어짐은 정하신 이치이고 우리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보배로 삼게 하셨다.
시편 45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다. 고라는 레위 족속으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땅이 꺼져 죽임을 당했다. 마스길은 ‘교훈’이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 16:3).” 저들 나름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셨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32).” 저들은 저주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목격 된다. 뒤에 다시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면서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26:10-11).” 즉 고라의 자손들은 살리셨다. 더욱이 저들은 조상들의 날을 통해 교훈을 삼았고, 주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19).”
시적 배경과 그 정황은 물론 시어가 주는 함의를 머금게 하신다. 다시 말해 나는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는 표현에다 밑줄을 긋고 이를 묵상이라 정의하였다. 묵상이란 말씀을 삼키기 전에 오래 머금고 있는 시간이다. 마치 음식을 먹는 일과 같다. 멸치나 시금치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뱃속으로 들어서 어떻게 분해가 되어 어떤 작용에 의해 피로 가고 뼈로 가는 영양소를 공급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입에 머금고 있을 때의 맛과 후에 배에서 일어나는 결과뿐이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3).” 그것으로 우리는 ‘고하는 삶을 산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4).” 이는 목사니까, 교사니까 행하는 별도의 사명이 아니다. 구약에는 그러했으나 이제는 모두의 사명이다. 예수께서 이를 우리에게 회복시키셨다. 우리는 저마다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으로 살아야 한다. 선지자는 예언을 하고 제사장은 예배를 하며 왕은 통치를 한다.
그러나 왕은 다스려야 할 세상에서 종노릇하고, 제사장은 예배해야 하는 것에서 ‘해야 한다는 당위’에 젖어 예배가 일이 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은 앞으로의 일, 곧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선포하는 것인데 이를 신비화하거나 미신적으로 여겨 쓸데없이 신성시하는 직업군이 생겨났다. 이를 모두 다루기에는 시간이나 지면이 모자라 시편 45편을 두 차례로 나누어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다시 돌아오면, 내 입술이 은혜를 머금는다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2).” 우리는 왕으로서 사람들보다 아름다운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살아야 한다. 영원한 복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가령 친구가 아버지의 항암치료 결정이 다시 한 달 뒤에 검사해보는 것으로 결정되어 연락을 주었다. 우리는 늘 당장의 일에 급급하여 주께 기도하고 바라고 안달을 부린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는 입안의 맛으로 웃거나 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늘 저만치 앞서서 일하시고 계신다. 이를 헤아려 우리가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묵상이다. 은혜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말씀은 전부다.
이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사는 일, 나는 묵상글을 쓰거나 설교원고를 작성할 때마다 이를 느낀다. 그 맛이 때로는 쓰거나 불편하다. 삼킬 수가 없다. 실은 처음 본문 45편 시편을 읽을 때는 마음이 어려웠다. 내 입술의 열매는 어디 두고 내보이기 민망한 것 투성이다. 함부로 투덜거리고 원망하고 누구를 욕하고 비난하길 잘한다. 이는 기질이거나 성격일 수 있다. 그런데 재차 읽고 되씹고 되새기며-묵상이란 이렇듯 입안에 머금고 오물거리며 씹어서 삼키는 일이다. 그럴 때 이것이 단순히 말의 정도나 인격의 하나로 ‘입술의 은혜’를 말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하는 시인의 먼저 고백이 있었다(1). 여기서 화자는 왕을 객관화시킨다. 왕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동시에 이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하신 직분으로서의 왕이다. 나는 이 두 구절의 말씀이 너무 내 입에 은혜로워서 이 한편의 시를 한 번에 다 다루기에는 욕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1연의 왕과 2연의 왕은 동일하나 다르다. 1연에서의 왕은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나의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처럼 공들여서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찬양하고 싶다. 2연에서 왕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인물로 그 직분은 아름답다. 격에 맞게 그의 입술에는 은혜를 머금었다. 1연과 2연의 왕은 동일하다. 전능자 하나님이시며, 그런 왕된 자를 영원히 복 주신다. 그러니까 지칭하는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데 주목한다. 어쨌든 내 이야기여야 한다. 나는 성경에 대해 고집처럼 이런 자세를 유지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든, 다윗의 이야기든 모두 다 내 이야기여야 한다. 성경을 내게 주시는 이유다. 말씀이 내 안에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각각 영양소를 공급하는 과정도 그러하다. 그저 다윗의 이야기로 그치면 그게 뭐? 저가 그랬다는데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이면 그게 뭐? 성경은 단지 모형이 아니다. 걸작을 전시해 놓은 게 아니다. 박물관이 아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 입에 머금었다가 삼키면 그것은 내 것이다. 내가 된다. 그것으로 나는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하는 것이다. 그게 그저 몸 밖에 있을 때야… 나는 친구에게 묵상을 권하였고, 그것으로 눈 앞의 일 너머의 하나님을 뜻을 헤아려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때론 달갑지 않고 심지어 나를 괴롭게 한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마치 반역한 고라와 그 무리를 모두 벌하시지만 그의 자손들을 훗날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기셨다니!
이를 오늘 말씀에서 나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실은 나의 뜻을 구하고 바라는 게 좋지 주의 뜻을 바라고 구하는 데는 모험이 따른다. 나는 이 길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저 길로 인도하시고, 나는 바라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럼에도 주를 바란다는 것은 ‘좁은 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들 자기결정권을 고집한다. 자신의 행복추구권이 하나님의 주권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자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막연히 ‘알았어!’ 하면 되는 길이 아니다. 누구에게는 그토록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이는 마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말씀이 말씀으로 굳건하시다.
저마다 할 말이 많은 법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 13:26-27).” 나름 주를 알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사하며 살았다. 한데 결정적인 순간에 ‘알지 못하노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가히 소름이 돋는다. 하물며 ‘나를 떠나가라.’ 하실 때면… 그때에 과연 저들의 결과는 어쩌면 좋을까? 나는 기분이 어떻든지, 몸 상태가 어떻든지 이처럼 아침이면 말씀을 입에 머금고 그 은혜를 입에 가득 베어 물기를 소원한다. 더는 어쩔 수 없는 그날까지 묵상만이 살 길이다. 이는 마치 천국이 확장되는 것과 같아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18).”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9).” 말씀을 붙들었을 때 나는 그 가지에 깃드는 한 마리 새가 된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0-21).” 내 안에서 확장되고 확대되는 세계에 대하여, 나는 나의 이해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하시는 말씀에 의지할 따름이다. 곧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