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5편 1-5 /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①

전봉석 2021. 2. 26. 10:35

 

210228 주일

 

 

시편 45편 1-5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①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대상 13:14).”

 

오늘 말씀에 앞서 오벧에돔에 대해 잠시 나누자. 성경에서 오벧에돔을 거론할 때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내용이 따른다(삼하 6:1-15). 사울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법궤를 소홀히 하여서 아비나답의 집에 20여 년간 방치되었다. 이를 다윗이 왕이 된 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면서, 3만여 명의 각계 인사를 초청하고 거대한 행사를 벌였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5).”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법궤를 실은 수레의 소들이 날뛰었다. 그때 곁에 있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손을 들어 궤를 붙들었다가 즉사했다. 좋은 날 웃사가 죽자 다윗은 법궤 모셔오기를 미뤘다.

 

그때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으로 메어가기를 청하였다. 그런 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1).”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를 모신지 불과 석 달이었다. 아비나답의 집에는 20년이나 머물렀다. 20년이 머물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죽었고, 3개월을 머물던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았다. 아비나답의 20년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단 3개월을 모신 오벧에돔의 집이 어찌나 복을 받았던지, 그 소문은 예루살렘 왕궁에도 들어갔고 다윗은 이를 듣고 기쁨으로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사렘으로 모실 수 있었다.

 

오늘 시편의 궁극적인 주제는 축복이다. ‘사랑노래’로 ‘왕의 축혼가’로 분류된 시이다. 우리가 알듯이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다. 사랑은 은혜의 정점이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이를 두 번에 나누어 다루게 되는 이유가 밝혀질 것이다. 제목도 시에 표현된 그대로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나타나는 현상, 축복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우리 입에 은혜를 머금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은 1절로 5절까지의 말씀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짚어보았다.

 

첫째,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하나님이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1-2).”

 

이 시의 출처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다. 마스길은 ‘교훈’이다. 고라는 레위자손으로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반역을 꾀한 인물이다(민 16:3). 스스로를 높여 여호와께 분향하려 하였고, 사람들을 모아 세를 불려 선동하였다. 그 일로 하나님은 노하셨고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32).” 저들은 일순간에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고라의 자손을 살려두셨고,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26:10-11).” 훗날에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은 성전에서 찬송하는 자들, 성가대가 되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19).”

 

시의 언어는 함축적이다. 마스길은 포괄적인 의미로 교훈이다. 깨닫다, 생각하다의 속뜻을 지닌다. 고라 자손이 깨달은 바, 그 생각한 것을 ‘소산님’ 곧 ‘백합화의 곡조’에 실어 부른 찬송이다. 소산님은 음악 용어이다. 또한 백합화 모양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추정한다. ‘소산님에둣’은 ‘백합화의 증거’라 하여 시적 운율이나 리듬을 뜻한다. 곡조에 맞추는 선율이다. 중요한 것은 시의 언어다. 시어는 다의적이다. 함축적이어서 단지 사전적으로나 지시적으로만 국한지어 해석할 수 없다. 화자인 나는 고라의 자손일 것이고, ‘왕을 위하여’ 부른 표면적인 시적정황을 갖는다. 왕은 다윗이거나 솔로몬이나, 물론 우리 구주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총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들어가서 그 의미를 새겨보면 실제 우리의 직분-선지자, 제사장, 왕- 가운데 하나이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이에 ‘내 마음’은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가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먼저는 기도이고 찬송이며 나아가 하루하루의 일상이기도 하다. 곧 우리의 하루는 날마다 지어진다. 이를 예수님은 집을 짓는 일로 비유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24:25).” 우리 인생은 그저 떠돌다 가는 나그네가 아니다!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그 삶이 얼마나 공들여 쓴 글씨 같다. 온통 말(言)들이 수놓은 세계다. 곧 어떤 말을 하며 사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을 가리킨다. 주로 그 혀로 쓰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나,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나,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이에,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앞서도 설명한 것처럼 왕은 구별된 자로 우리를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람들과 달리 아름다운 것은 남들과 다른 언어를 그 입에 머금고 살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는 것은 감사와 찬송이다. 하나님을 바라고 주를 자랑하는 말이다. 남들 앞에서 주를 인정한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예행연습중이다.

 

성경은 단지 책이 아니다. 걸작인 예술품도, 어디에 걸려 전시된 작품도 아니다. 날마다 우리의 양식이다. 매일 썰고 다져, 씹어서 삼켜야 하는, 우리 영혼의 영양분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독생자의 영광,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이란 이를 먹고 마시는 데 있다. 그런데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곧 우리 입술에 머금은 은혜는 말씀이다. 날마다 더해지는 묵상이다. 묵상은 오래 머금고 자신을 살피는 일이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4-5).” 그 말씀이 우리를 감쌀 때,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곧 마음의 것이 혀끝의 말로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로 우리의 혀를 적시는가?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전 10:12-13).”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은혜를 그 입술에 머금지 못하면 금세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린다(엡 4:31). 늘 자기 기분이나 주장, 생각에 이끌려 기도하고, 온통 자기 이야기밖에는 관심이 없다. 일용할 양식으로 족한 줄 모르니 감사가 없다. 이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 곧 우리 입술의 은혜는 우리로 자족하게도 한다.

 

둘째, 혀를 단련하여 말(言)을 무장하라.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3-5).”

 

자고로 ‘세 치 혀’를 다스리는 일은 어렵다. 단지 인격적인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안 믿는 자도 온화한 말을 한다. 누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늘 품격 있는 말을 쓴다. 우리가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왕을 위하여 지어지는 말’로 산다는 의미는 단지 그런 게 아니다. 마치 전투에 참전하는 용사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직적이다. 하나님을 바라고 천성을 향한다. 하지만 우리의 말은 수평적이다. 늘 먹고 사는 이 땅의 문제로 씨름하는 말들뿐이다. 감정은 말을 지배한다. 아, ‘왕의 영화와 위엄’이 우리 입의 은혜여야 한다. 허투루 쓸려 다니는 말들은 허망하다. 수다는 싱겁고 남을 험담하는 말은 씁쓸하다.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우리 혀는 단련되어야 한다. 우리의 권능은 능력 주시는 자의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고라의 자손들처럼 조상의 잘못된 언사가 저들을 단련시켰다. 저들 혀의 찬송은 긍휼하신 은혜를 맛본 자들의 것이다. 우리의 겸손은 왕관의 무게와 같다.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오늘 날 주의 병거는 교회다. 교회와 함께 할 때 ‘왕의 오른손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곧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오늘 우리는 새삼 우리의 잃었던 직분을 되새기게 되었다.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우리의 왕의 직분은 회복되었다. 혀의 은혜로운 말로 우리 원수의 염통을 뚫어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우리가 행할 일은 우리 혀끝의 은혜로 알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입술에 머금고 살 것인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우리 입의 은혜는 단지 현학적인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원수의 염통을 뚫을 것이고, 잃어버린 왕권을 회복하시는 주께 향한 경배의 찬미다. 오늘의 전투는 영원한 나라의 찬송이 될 것이다. 다음 시간에 이어, 처음 사람 아담이 누렸던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우리가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사는 자의 실질적인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인 우리 영혼이여!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