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의 처를 기억하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누가복음 17:32-33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편 129:2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종교심이다. 스스로 구하고 찾는 열심이다. 도덕주의자 또는 평화주의자가 되려 한다. 아닌 건 아닌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면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보전하려 한다. 오늘 말씀은 묵상할 때마다 아찔하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경우를 맞을 때가 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하심은 그 주체가 내가 아닌 것이다(눅 17:32-33). 오히려 무엇이 되려하기보다 무엇이 된 자신에게 놀란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되어진 일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나의 수고와 노력의 결실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를 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계시’다. 때론 그러한 자신에게 놀란다. 나로 그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게 하신다. ‘터가 굳어져’ 가게 하신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게 하신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면 알수록 주를 바란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만 채워지기를 구한다. 이를 구하고 바라는 사도의 기도가 풍성하게 내 마음을 넘실거리는 것 같다. 늘 징징거리고 빌빌대는 하루하루지만 나의 하루가 소중한 까닭은 그 안에서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묵상하고 체험하게 한다. 나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주의 사랑의 너비 안에 있고, 내가 교만하여 끝도 없이 높아지려한다 해도 주의 사랑의 높이가 더욱 높다. 그 깊이는 나의 죄악을 모두 용서하시고 품을 수 있을 만큼 깊으시다.
저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4:19-20).” 그것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1-24).” 거듭 되새기게 되는 말씀이다. 새사람을 입는 일은 전혀 다른 나로 사는 것이다. 스스로도 달라진 모습에 종종 놀라고 낯설어할 정도이다. 본래 사람은 여러 가르침을 통해 그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임으로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일갈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다시 태어난 것으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내가 어찌 이와 같이 말씀을 구하고 바라는 것인가, 스스로도 놀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 영의 일을 육의 이해로 감당할 수 없다.
다만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9:2).” 세상이 아무리 어떠해도, 심지어 내가 나를 결국은 어쩌지 못하는 까닭은 주가 이루시는 나를 그 무엇도 이기지 못한다. 저들이 물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나는지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다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만 이미 내 안에 임하신 나라다. 이러한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26).”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노아의 심정은 어땠을까? 저를 지켜보며 많은 사람의 조롱과 엇갈리는 반응은 또 어떠했을까? 굴복했을 만도 한데 끝끝내 저의 가는 길을 지키신 이는 여호와이시다. 롯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 성이 무너질 때도 그러했다. 롯의 사위들은 저의 급박한 경고를 농담으로나 들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그리고 월요일 아침, 창밖으로는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린다. 창을 조금 열자 바람은 아직 차다. 저마다 주신 생을 다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인생을 경계해야 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이 땅에서의 삶은 웃고 즐기는 데 있지 않다.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렘 16:8).” 나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 복이다. 됨됨이가 그러하여 좋을 때는 이를 소홀히 여긴다. 죄를 좇아 즐거움을 구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는 주의 사랑이 그의 말씀이 거치는 돌이었다. 그러한 나를 돌이켜 주 앞에 세우시는 데 있어,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맺으신다. 나의 행실을 내가 수고하여 덕을 세우며 도덕과 경건주의자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나도 나를 어떻게 이처럼 이루시는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한다. 그렇게 또 용서하시는 주님이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우리에게도 그리 하신다.
먼저는 자신에 대하여 용서가 필요하다. 어릴 적부터 쌓아두고 사는 여러 상처와 낙심과 좌절과 그에 따른 열등의식들로부터 기질과 생각과 응어리진 마음을 모두 풀어내게 하신다. 자신에 대한 옹색한 변명은 말할 것도 없다. 부모를 향한 원망은 물론 자신과 남과 다른 모든 연약한 것들을 향한 보복을 멈추게 하신다. 이를 모두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도덕을 쌓고 선을 이루어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를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 그리하여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된다.
먼저는 자신과의 문제로부터 해방이다. 의외와 본인과 원수지고 사는 경우가 많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 모두 그것에 해당한다. 본래의 자신과 척을 지고 사는 경우, 지나치게 자신을 돌본다. 그 위하는 마음이 어릴 적 못 가졌던 장난감을 선호하고 오늘에 이르러 자신의 기호를 우선하게 한다. 실상은 결핍 때문이다. 지나치게 자신을 함부로 여기는 경우도 결여다. 자신을 향한 주의 형상이 가려져서 그런다. 본래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존귀다. 그것을 죄로 인하여 눈멀고 귀멀어 알아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그래서 보면, ‘지나치다.’ 지혜자는 각별히 이를 경계하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다함은 스스로의 애씀과 수고로 이루려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종교심과 도덕이 왜 신앙의 원수인지 알겠다. 인위적인 모든 노력이 자신을 숭배하는 일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시 느끼지만 우리는 학습된 구도자가 아니다. 가르침이란 수긍과 납득을 전제로 한다. 성령은 이를 배제한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납득할 수 없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래서 나다. 어째서 나 같은 자를 주께서 사랑하셨는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를 받아들이기란, 이성과 상식으로 불가능하다. 한데 스스로 ‘지나치게’ 굴며 선을 구하거나 악을 경계하는 것은 모두 거짓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게 옳다. 그래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다만 주를 경외한다. 이는 그 모든 결과가 주의 것이다. 주께 맡기는 것은 실제 불가능하다. 우리의 의지로는 될 수 없다. 안 되니까 못한다. 못하니까 엎드린다. 강요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르침으로 깨달아 아는 게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반을 동행하며 가르침을 받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베드로는 부정하였고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 죽게 하였으며 제자들은 모두 돌아갔다. 성령이 아니시면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도 저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다. 다만 나는 오늘도 ‘습관을 좇아’ 행할 뿐이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그러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무던히 습관을 좇아 기도하였다. 습관은 한 번 두 번 익힌 하루하루의 반복이다. 나의 무던함은 그리 좇는다.
습관은 인격이 되고, 성령의 열매는 그것에 열린다. 인위적으로 도덕주의자가 되고 경건주의자가 되어 이루어내는 결실이 아니다. 인격이 된 습관은 운명이 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월요일 아침, 주일에 어디가 아팠고 뭐 때문에 힘들어서 어쩌고저쩌고 했던지, 모든 사연을 뒤로 하고 다시 아침이 되었다. 나는 습관을 따라 말씀을 펴고 주께 아뢴다. 욥의 고백처럼 주께서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아뢰리라(13:15) 하는 고백이 나의 마음이 되길 바란다. 아마도 노아는 아침마다 무던하였을 것이다. 비가 올 것인지, 홍수로 진짜 심판을 하실 것인지, 사람들의 조롱과 시선에도, 스스로의 회의와 갈등에도, 그건 그대로 두고 그냥, 그저, 묵묵히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었다. 오늘은 창밖에 비가 내린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베란다, 내 책상 앞으로 밀려든다. 이만한 것으로 족하다. 늘 징징거려서 어디가 아프고 뭐가 힘들고 하는 말을 되풀이 하기도 민망하지만, 그런 마음도 그런대로 내버려두고 나는 그냥 또 말씀 앞에 앉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속된 말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어떤 열매가 맺힐는지 어떨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다만 습관을 좇아 말씀 앞에 앉았다.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 나로 하여금 그리하게 하심을 믿으며.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책임져야 할 책임은 없다. 주께서 이미 다 지셨다. 다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다만, 내 안에 또 하루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날 가운데 한 날이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큰일을 나는 내 곁에 나눌 수 있는 자와 나눌 뿐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8-39).”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9:2).” 고로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