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5편 6-17 /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②
210307 주일
시편 45편 6-17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②
들어가는 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의 직분을 가졌다는 의미다. 요한은 이를 되새기며 다시금 강조하였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원의 확정이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베드로도 이를 강조하면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를 확장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전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여기서 ‘아름다운 덕’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편에서의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증거 되는 결과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곧 이 말씀을 우리 입에 머금은 삶이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14). 이를 선지자로서 우리는 선포해야 하고, 제사장으로서 예배하는 삶이어야 하고, 왕으로서는 맡은 바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해야 한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이 말씀으로 들어가면서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첫째,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시 45:2).” 둘째, 이를 앎으로 우리는 우리의 혀를 단련하여 머금은 말씀으로 무장한다는 것을 것을 살펴보았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4).” 그러할 때 우리의 화살 곧 우리가 머금은 은혜의 말씀으로 원수의 염통을 뚫었다.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5).”
1. 선지자로서의 사명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우리는 이를 선포하고 예언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 취하는 것이 아니다. 맡기신 직분은 다양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 4:11).” 우리를 그처럼 삼으신 것 자체가 사역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특정한 직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히 1:7).” 이는 모두 주가 정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규는 공평하시다.’ 이를 예언하고 선포하는 일이 우리 사역이다. 성별 나이 직업 그 어떤 조건도 제약이 될 수 없다. 온전히 주가 이루시는 열심이시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이는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부여 받은 직분이었다. 저들은 당시 ‘완전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자들이었다. 저들은 선지자로서 모든 사물의 이름과 온갖 생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름은 그 존재를 특정 한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은 좋으셨다.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었다. 저들은 또한 제사장으로서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나누며 안식과 쉼을 누렸다. 또한 왕으로서 그 모든 자연을 다스리고 통치하였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으셨다. 그런 저들이 죄로 인하여 허무하게 그 모든 직분을 상실하였다. ‘완전한 사람’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다스리고 누리고 예언할 수 없었다.
그들이 죄로 상실한 사명자의 직분을 예수께서 복원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이를 간헐적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수행하며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다. 이를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회복시키셨다.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실 나라’ 새로운 규이다. 주의 나라의 공평한 규는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4-5).” 하는 예언의 계시를 우리는 들었고 알았고 이를 전하여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회복되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2. 제사장으로서의 사명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
제사장의 직무는 예배다. 주를 경배함이다. 참으로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다들 저마다의 일로 정신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이란 어떤 직업을 가졌든, 무슨 역할을 하고 있든, 그 자리에서 날마다 드려지는 예배자로서의 삶이다. 아이들을 대하고 가르칠 때, 직장에서 업무를 감당하고 맡은 일에 여념이 없을 때, 즉 공부를 하고 있든지 밥벌이를 하고 있든지, 심지어는 병자로 앓고 있든지… 우리는 선지자로서 주의 살아계심과 장차 도래할 장래의 일을 증거 해야 한다. 이를 사는 것이 예배다. 바빠서 성경 볼 시간이 없고 기도할 틈이 없다는 소리는 그 사명이 죽었다는 소리다. 성경을 한 장을 읽든지 일독을 하든지, 기도를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서 하든지, 걸으면서 운전을 하면서 하든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여기서 우리는 예배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주께 집중하는 삶으로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곧 오늘 시인은 우리가 익숙하여 나른한 생활을 버리라고 한다(시 45:10).
예배란 때로 낯설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아비의 집을 떠났고, 왕궁을 버렸으며, 사막으로 내몰렸다. 따로 구별됨이란 우리의 일상을 불편하게 한다. 남들은 다 괜찮다고 여기는 것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그리고 구별되게,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12).” 드려지는 삶이어야 하고 보여지는 얼굴로 살아야 한다. 왜?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1).” 오늘 시편은 이를 확실히 하고 있다. 예배란 곧 경배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이 단순한 이치 앞에서 번번이 우리는 주저하곤 한다. 하지만 엄연히 성경은 그 입장을 명확히 하신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세상을 사랑하며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돈과 명예를 따르면서 하나님을 따를 수는 없다.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은 두문불출 혼자 살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들로 주를 경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시 45:15).” 곧 예배는 그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복락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것이 그때에 누릴 것으로 준비 되어야 한다. 곧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그리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이것이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날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
3. 왕으로서의 사명
“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시 45:16).”
우리는 이를 모두 계승한 자들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는 엄연한 보증이다. 우리가 임의로 취한 것이 아니다. 두려운 권한이며 막중한 책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한다.
먼저는 자신을 통치하고 다스려야 한다. 돈과 명예를 다스려야 하고, 실패와 좌절도 다스려야 한다. 병마도 다스려야 하고 인생의 고난도 통치하고 다스려야 한다. 저들이 나를 쥐고 흔들지 못하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나오는 말
이 시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다. 전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마스길은 교훈이다. 생각하다, 깨닫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주를 찬송하는 족속이 되었다. 그들의 조상 고라는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세를 불렸다가 땅이 갈라져 죽었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하심이 크셨다.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11).” 훗날에 저들이 성전에서 찬송 맡은 자로 사는 무리가 된 것이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므두셀라의 뜻은 홍수 심판이다. 저는 969세로 인류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저가 죽는 날 120년 걸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였고 홍수 심판을 알리는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참으로 두려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시작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말씀으로 우리 혀를 단련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고 신앙은 천성을 향한다. 이는 수직적이다. 한데 우리의 말은 늘 먹고 사는 문제로 말씨름을 하느라 수평적이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오늘은 우리의 잃어버린 직분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로서의 삶을 살펴보았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값으로 회복하신 직분이며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사역자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처지에 놓였든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0).” 날로 새로워지는 자신의 속사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제 곧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