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누가복음 23:28-29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135:14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가시면서도,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돌보신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 23:28-29).” 거두고 돌봐야 할 것들이 도리어 우리를 붙든다. 그 날이 얼마나 끔찍하면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 차라리 산에 깔려 죽기를 바랄까? 죽어 무덤에 들어가기를 원할까?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3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앉아 이때를 생각하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주 안에서 평안하신가? 그럴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자가 복이었다. 이는 진리를 아는 자로 그의 성전에 거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35:2-3).”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로 그의 성전 뜰에 서 있게 하심이다. 그렇다면 의심해야 한다. 주님과 관련된 나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직하고 성실한 것은 단순한 선한 사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다. 저는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장사지낸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눅 23:50-51).”
성실은 정성스럽고 참된 것을 의미한다. 그저 막연하게 책임을 다하는 정도가 아니다. 종종 주를 생각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나도 다 안다’는 어설픈 자기 판단이다. 어지간히 교회 좀 다닌 사람이면 성경의 이야기 어느 정도는 그 줄거리를 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기도도 한다. 예배에도 간다. 교회 활동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꾸짖어 그것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님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다른 노력으로가 아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여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이상 저는 모르는 자이다. 바울은 이를 반증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13:10-12).” 곧 내가 주를 안다는 것은 들은 이야기로 족한 게 아니라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소원한다. 이에 저는 결코 자신이 얻었다, 이루었다 생각하지 않고 잡힌 바 된 그것을 위해 달려간다. 산다는 일은 그와 같아서 모든 게 제 자리가 있고 그 역할이 각각이다. 어제는 교회 청소를 하다 고무나무 화분 하나를 깼다. 옆에 누가 빈 화분을 주어 분갈이를 하게 된 것인데, 단순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너무 뻗어 가지를 쳐내고 물그릇에 담아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저를 옮겨 두려니 같이 옮겨야 하는 것들이 따라왔다. 본래 있던 자리의 것들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럴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모든 게 옮겨지고 뒤바뀌면서 졸지에 봄맞이 대청소가 된 셈이다. 혼자 그것을 치우느라 오전을 다 허비했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잡힌 바 된 그것을 위해 갈려간다’는 말씀 앞에서 연상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자니 본래 있던 것들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하나를 옮기면 둘 셋 저마다 자리를 찾아야 하고 그러느라 정작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있다.
주를 바라고 따른다는 게 어떤 일인지 연상하게 된다.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돌보고 신경 쓰고 건사해야 할 게 많은 자들은 그만큼 더디고 결단이 어렵다. 이를 나는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바로 알고 묵상밖에 답이 없다. 말씀으로밖에는 나를 이끌어갈 수 없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조금만 들춰내도 삽시간에 치워야 할 것들이 쏟아져 나와 어제는 본의 아니게 몸을 비틀며 일일이 그것들을 치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내는 무릎 수술을 결정하고 엠알아이를 찍고 상태를 확인하였다. 아들은 내려와 공부를 하고 나는 모처럼 누구누구와 통화도 하고 안부도 들었다. 그런 가운데 나를 사로잡는 말씀을 메모하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모든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나의 구속 사역을 미리 예정하시고 계획하셨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우리의 염려와 근심은 얼마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왜 뜬금없이 대청소가 되어버렸나 생각했더니 내 안에 불안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아내가 딸애와 함께 병원에 가고 간단한 무릎 시술 정도에서 수술로 결정이 되고 혹시 인공관절이나 연골을 삽입하는 큰 수술이 될지 모른다는 말에 마음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다른 데 정신을 쏟느라, 꼬여 있던 전선들을 새로 정리한다거나 어제처럼 화분 하나로 온 교회 안을 뒤집어엎어 병적으로 청소를 하였다. 누가 감히 이 진리를 안고 하는가? 저는 내가 죄를 짓기도 전에 나의 구속을 위해 죽기까지 계획하셨다.
이는 ‘그 뜻의 비밀’이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다. 선택론이니 예정론이니 하는 설명 따위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오직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창세 전, 우리의 의식과 이해가 도달할 수 없는 시간 저 너머의 시간에서 ‘예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면 오늘의 나의 염려나 근심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되겠나? 그렇게 행하심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음미하는 일이 참 좋다. 나도 모르게 불안에 겨워 일을 벌이듯 청소를 하고 난리를 치는 것처럼 사람들의 우상은 날로 세밀하여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을 신봉한다. 그리하여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시 135:15).” 자기들이 만든 것을 두고 자신들이 어쩌지 못해 그 앞에 절하고 숭배한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16-18).” 이는 참 기가 찰 노릇으로, 말씀 묵상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들어차는 헛된 노고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역설하신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럴 수 없는 우리의 성품을 아심으로 더욱 그러하기를 강권하심이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엠알아이 감사결과 그렇게까지 진행은 되지 않아 초음파시술 정도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국수와 김밥을 사다 교회에서 같이 모여 늦은 점심으로 먹고 나는 집으로 왔다.
불안에 의한 결벽증 환자처럼 교회 청소를 하게 되어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온 몸이 쑤셔서 뜨거운 장판에 몸을 지지며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계획을 나의 이 미천한 마음으로는 따라잡을 길이 없다. 이미 우리 안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두셨다.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되새기면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시 135:1).” 나로서는 주를 찬송하는 것뿐이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5).”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13).” 이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14).”
오직 주를 바람이여!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9).” 곧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