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21. 3. 8. 06:04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24:11-12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4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이를 믿는 일은 기이하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베드로의 경우도 ‘여자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음을 알리자,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24:11-12).” 그저 놀랍고 희한한 일이었다. 더는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로서는 우리 의지로 다가갈 수 없다. 오라 해도 오지 못하고 전하여도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를 믿는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 기이할 뿐이다. 이처럼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4).”

 

지난 몇 주간 나는 우리의 입술이 은혜를 머금는다는 데 묵상을 모았다. 이를 말씀으로도 전하고 그와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데 감사하고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곧 오늘 우리가 아는 이 앎은 내가 아는 지식으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안 믿는 누구에게 증명할 수 없고 저를 탓하지도 못한다. 다만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이 또한 누가 나를 가르쳐서 알게 된 깨달음이 아니며 다만 기름 부음은 그 역사로 증명되는 것이다. 곧 기름 부음은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증거다. 본래 우리 사람은 그와 같은 존재다.

 

처음 사람 아담은 이를 완벽하게 증명하였다. 모든 사물과 생물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이란 그 존재의 증거이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은 좋으셨다. 곧 하나님의 뜻을 저는 알았고 이를 선포함으로 그리 증거하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준행한 것이다. 또한 저는 자신들이 벗은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주께 집중하고 바라고 찬송하는 나날의 삶이었다. 훗날 죄를 범하고 자신의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려보는 한심한 수준에까지 떨어졌지만 저의 날들은 예배자로 제사장의 사명을 다하는 나날이었다. 그뿐인가. 그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직분도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처음 사람 아담의 완전한 삶은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었을까?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죄가 들어와 저는 일순간에 쫓겨났고 저의 첫 열매는 살인자를 낳은 것이었다. 구약시대는 혼란의 시절이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저들을 분화시켜 선지자를 선지자에게 맡기시고, 제사장을 제사장에게 두시고, 왕을 왕에게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대부분 저들은 그릇된 길로 갔으며 그나마도 더욱 악한 일에 선봉이 되었다. 혼탁의 시대가 끝도 없이 이어질 때 독생자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다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하시고 그와 같은 직분을 회복하셨다.

 

베드로는 이를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더는 다른 구원은 없다. 이미 다 이루셨다. 우리는 처음 아담, '완전한 사람'이 아닌 '신령한 영'으로 거듭났다. 이를 이루신 이는 태초의 말씀이시다.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태초는 모세가 기록하는 창세기의 태초와는 다르다. 창세기의 태초는 모든 시간의 시작을 알리지만 요한의 태초는 그 시간 이전의 시간으로 우리가 가늠할 길 없는 영원한 전의 영원에 해당하는 태초다. 우리 주님은 그때에도 말씀으로 계셨고, 오늘에도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증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 말씀이 하나님이신데, 저가 이제 우리 가운데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그 증거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음은 오늘 본문 누가복음의 마지막 증거로도 입증된다. 저는 사람으로 오셨다 가셨다. 사람처럼 죽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으로서 살아나셨다.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게 우리의 ‘믿음’이다. 역사적으로 예수는 오셨다 가셨다. 한데 그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내 안에서 지금 이처럼 존재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그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 충만함의 결정체가 믿음이다. ‘왜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하며’ 사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가령 한 아이가 온다고 하더니 누구랑 같이 오겠다고 하였고, 그 애가 못 온다고 하니 다시 요일을 변경하며 시간을 물었다. 나는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실은 별로 관심 없다. 정에 이끌려 어떻게 지냈니? 하는 안부 따위에도 관심이 없다. 다만 저의 영혼의 일이다. 하려는 의지와 바로 살려는 마음은 그 영혼의 문제이다. 어떻게 살든 그저 인생의 일이 전부이면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어떻게 살든 나이는 들고 곧 있어 병들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누구는 어떻게 지내고 그땐 그랬지? 하는 그리움 따위로 새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저 아이를 주가 사랑하신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련에도 연결을 끊지 않고 내 안에 저에 대한 애정을 남겨두심을 그리 이해한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막연한 느낌으로가 아니다. 실제다. 종종 벌어지는 별의 별 아이들을 상대할 때 단순히 저 애가 잘 살기를 바라는 게 전부이면 나 같은 게 할 일이 뭐 있겠나? 또는 저거 어디서 뭘 하고 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이처럼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이는 것은 주가 두시는 마음이다. 나는 이제 그리 안다. 6개월 1년씩 연락 안 하고도 지내는 사이면 그 정도일 뿐이다. 나중에 새삼 안부를 묻고 어쩌고 하는 정이야 또 그러다 마는 일인 것이고. 다만 곁에 두시는 이 한 영혼이라! 내게는 수천이 있고 수만이 있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저마다 교회는 부흥에 관심이 있지 한 영혼은 등한시한다. 예수께서는 죽었다 살아나신 와중에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가셨다. 저들과 동행하며 주의 살아나심과 그 증거를 보이셨다. 나는 오늘 본문으로도 새삼 확신을 더한다. 그럴 거면 더 많은 군중 앞에서, 아니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한 빌라도나 헤롯을 찾아가 살아나심을 증거하고, 박해하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을 물리치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달았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 드러내어 세계를 전복하심이 훨씬 합리적일 거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작 몇 명, 곁을 지키며 같이 했던 그 한 영혼에게 보이셨다.

 

나는 나에게 두시는 이 마음을 때론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 애’가 뭐라고! 그런데 저런 아이들의 특징은 누구랑 같이 또는 그가 가면 같이 오겠다는 식으로 전가한다. 그렇게 같이 오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또는 어떤 일을 다루고 나눌 수 있겠나?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 앞으로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지, 하는 따위에 대하여는 솔직히 이제 관심이 없다. 저들이 어찌 사는가,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이람? 다만 우리가 같이 오늘도 하나를 바라보고 그 하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그런 게 아니면 굳이 만나는 일조차 번거롭고 귀찮다. 그렇게 다녀가 안부를 알았다 한들. 다들 그러는 게 사는 거지, 싶지만 그러니까 하는 소리다. 그러고들 사는 일에 뭐 그리 의미를 둘 거야! 토요일에 누구와 통화하면서 그런 생각이 강하였다. 애써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지내는지, 좀 어떤지, 그걸 궁금해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이 진리를 행여 잃지는 않고 잘 붙들고 나아가는지. 나는 어떤데, 너는 어떤지! 서로가 같은 것을 두고 바라고 기도하며 같이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요즘 나의 인간관계란 그렇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다 이겨놓으신 세상에서 죽어라 하고 끌려 다니며 사는 게 합당한가? 우리는 왕이요, 제사장이며 선지자다. 우리의 직분은 회복되었다. 이를 상실하고 살던 구약의 시대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똑같이 망각하고 살면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이 모두 허사가 아닌가? 하물며 재림의 때를 어찌 맞이할 수 있을까? 가령 어떤 친구와 30년을 넘겨 연락이 닿았다. 저는 목마른 사람처럼 그간의 삶을 들려주었다. 들으면서 나는 저의 사연이 그저 그랬구나? 하는 정도의 동정이나 위로가 아닌 것을 주께서 알게 하셨다. 다음 날부터 나는 이와 같이 묵상글을 보내고, 말씀을 보낸다. 저는 ‘아멘’으로 받는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고, 저는 저의 지난했던 과거를 고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공백의 정도와 상관없이 장차 있을 주의 약속을 붙들고 나란히 한 길을 걷는다. 언제부턴가 그게 아니면 굳이 새삼스러운 안부나 연결을 원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예전과 다르다. 주님은 단호하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하고 그 뜻을 분명히 하셨다. 그저 잘 살아라, 하는 게 아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도 아니다.

 

저는 엄연히 내 안에 거하심을 선포하신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곧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어째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언하신다. 우리 믿는 자의 담대함은 이를 근거로 한다. 저는 세상을 이기시었다. 그러니 세상과 화목하라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신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이를 구약시대에 욥의 친구 엘리바스도 알고 있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51).” 이는 진리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나는 다시 확신하지만 세상과의 화목이 아니다. 새삼 우리가 가까워지는 덴 하나의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오늘 시편은 이를 알고 강조하며 감사하기를 영원히 찬송하기를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