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전봉석 2021. 3. 9. 06:08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2-3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본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운다.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기억하며 울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으로 태초 이전 태초부터 계시던 이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그 심중의 일이 현실에 드러났다. 이에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 본문에서 주제를 양괄식으로 놓고 그 의미를 묵상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말씀으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신약을 진술하신 목적은 하나다.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이에 이루신 ‘하나님의 사자들로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게 하심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게 하심인데, 어둠은 빛을 꺼려하였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이는 단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의 일이다. 기껏 편하고 좋았다가 교회로 목사로 다가오려 하면 저들 마음이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감히 이를 이겨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다만 주께 맡김으로만 능할 수 있는 일인데, 누구는 실제 공황으로 누구는 불안으로 제지하는 세력에 부딪친다. 뭐라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저들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하심으로 이겨내거나 그로 인해 더 나은 쪽으로 인도하심을 받거나. 나는 다만 이를 지켜보면서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세상을 사는 일이 고달프고 다들 어려운 까닭은 수시로 드나드는 그 마음의 열린 구멍 때문이다. 누구는 장래 일로 또는 돈 문제로, 건강 때문에, 당장의 위로가 되는 안 믿는 여자 친구 때문에… 그 사연은 꺼려하는 마음의 농도와 비례한다. 그리고 다만 쉬운 길에서 안주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우리는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안 믿는 가정의 가족들에게 또는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께서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우리의 어둠을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을. 이를 주저하다 세월은 어영부영 흘러서 부모는 곧 나이 들고 병들어 곧 있으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럼에도 맡기신 사명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하려하면 성령은 가만히 계신다.

 

그러한 우리로 인해 육신을 입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도 하늘 문을 열고 오르락내리락 하신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이를 알게 하신다. 누구를 마음에 품고 그를 위하여 주께 아뢴다. 그때마다 길을 여시고 새로운 만남을 모색하시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사탄도 같이 그 길을 막는다. 어처구니없게 가장 비열한 훼방은 공황이나 불안장애이다. 기껏 괜찮던 아이가 훅, 하고 어려움을 호소하더니 나아오는 것을 꺼려한다. 이 또한 무슨 영문이신가 하여 임시로 가까운 교회라도 가게 하였으나 그대로 안주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혈과 육의 씨름이 아니다. 더욱 주께 의뢰하게 하려, 우리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셨다. 여기서 웃고 즐기고 행복을 추구하는 일보다 어리석은 삶은 없다. 울어야 마땅하다.

 

오늘 요한은 복음을 기록하면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는 것에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모은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9-11).” 그리하여 처한 상황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저들 강가에 서성거리는 일일 텐데 어찌 아니 눈물을 흘리며 살겠나?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이 권세로 우리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마주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3).” 이를 위해 하나님은 말씀이 되어 사람과 같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다시 말하지만 신약 성경의 주제는 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고, 우리의 관심은 그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자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거부감에 가로놓인다.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다, 또는 기껏 잘 오던 누가 막힘을 당한다. 어떤 이유로든 저도 주저하고 나도 주저한다. 나는 괜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역시 나는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겸손을 떠는 것 같이 교만이 나를 쥐고 흔든다. 결국은 내가 한다는 소리다. 내가 부족해서 못하는 일인데, 하고 생각하면 그럼 그 일을 내가 하는 일인가?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는 본래부터 빛을 싫어하는 어둠이 있다. 어릴 적 상처 때문이든, 자신도 알지 못하는 기질이나 성향의 문제든, 여러 모양의 훼방은 별의 별 짓거리를 다하면서 우리를 가로 막는다. 늘 또 제자리걸음인 것도 나는 이게 맞나? 싶은 회의가 들고, 오도가도 못하는 저 아이들은 그 틈을 타 속수무책으로 흩어진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오늘 본문은 한 가지 길을 제시할 뿐이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나는 다만 예수를 가리켜 예수로 우리의 구주 되심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다만 예수를 바라보는 길밖에는 없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곧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성경의 이치이고 은혜의 원리이다.

 

시편은 이를 알게 하는 기초석과 같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 73:1).” 우리의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신다. 때로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2).”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 그때마다 나의 연약함을 절감할 따름이다. 우리의 좌절은 번번이 ‘남들처럼 안 되는 것’ 때문이다. 오늘의 현상들은 그게 마땅하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3).” 다들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왜 우리만 이처럼 어려움을 겪는 것 같은지, 예수를 바라보지 않을 때 지레짐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안 믿는 친구가 더 잘 살고 예수 없이, 교회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즐거워 보인다. 저들의 일의 결과도 승승장구하는 것 같다. 그러니 예수를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손해 같다. 일찍이 노아는 그러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남들은 번듯하니 일가를 이루고 자기 소유로 번창하며 인생을 즐기고 호기롭게들 살아가는데, 이 무슨 땡볕 아래 홍수 걱정이나 하며 방주를 짓는단 말인가? 롯의 때에도 다들 멀쩡히 튼튼한 성곽 아래서 안전을 도모하며 향락과 음란에 도취하여 마냥 즐겁기만 한데 무슨 멸망의 경고인가?

 

예수님은 이를 역사적으로 상기시키시며,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눅 17:26-29).” 그러시며 덧붙이시길,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곧 우리에게 임할 날이다. 예수 재림은 기정사실이고 각각 개개인의 죽음도 그러할 것이다. 한데도 저마다 투항할 의사가 없다. 자기 안의 거부감을 용인하고 곁에서 부추기는 여러 현상들의 잘됨을 두고 저울질한다. 누가 오기로 하고, 연락을 하기로 했다가 그러지 못하였다. 나는 저더러 언제 오는지, 왜 안 오는지 재촉하지 않았다. 부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저에게도 오르락내리락 하실 것을 기다린다. 죽음은 모두 개별적인 것처럼 예수의 재림도 어느 날 문득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 그날에도 다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느라, 사는 데 정신 팔려 정작 살아야 할 방도를 깨닫지 못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이 하신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 세상이 그처럼 믿음직스러운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우리 영혼이 주를 갈급함은 복이 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시편은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정직하게 한다. 저들의 토로가 그러했고 주 앞에 내어드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가를 알게 하였다. 시편은 늘 ‘나만 그런 게 아니야!’ 하고 위로하신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그러하며 그러한데도 이 길을 나아갔다. 결국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매 시대마다, 각 사람마다 저마다 자신만 유독 그러한 줄 알지만, 그러므로 시편은 우리로 주 앞에 정직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관여하시고 함께 하시는가를 체험하게 한다. 그리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오늘도 바벨론에 끌려온 듯 현실의 강가에서 울고 있을 때,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아,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그러나 주는 위로하신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 곧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