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전봉석 2021. 3. 19. 06:06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한복음 11:20-21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편 147:18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은 <맡김>이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 의지로 할 수 없다. 저들을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 향유를 주께 붓고 주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주춤하게 된다. 황급히 서둘러 죽기 전에 살려주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도적으로 지체하셨다. 이틀 뒤 저들에게 이르렀을 땐, 나사로가 장사된 지 나흘이 되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마르다가 먼저 나가 맞으며 입을 연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곧 있다 마리아도 같은 하소연을 하였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어쩌면 우리의 맡김이 불가능한 까닭은 ‘~하였더라면’ 하는 나름의 신앙과 판단 때문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앞에 계신데도 그와 같은 소리로 주께 맡김은 좌절된다. 물론 저들은 누구보다 믿음이 좋았고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마르다의 이와 같은 고백은 훌륭한 것 같다. 하지만 저의 상식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자,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는 말로 대답한다(23, 24). 여기서 저의 말을 끌어내신 이유는 성경의 주제이며 말씀의 핵심이 되는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고 오늘 아침도 나에게 물으신다. 내 안에 가득한 ‘~하셨더라면’ 하는 숱한 가정의 헛된 신앙을 돌아보게 하신다. 몸이 건강하였더라면, 형편이 조금만 넉넉하였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내가 주께 돌아왔더라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가정문을 말씀은 제지하신다. 그러한 나를 보시며,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우리의 죽은 것과 다를 게 없는 영혼을 두고 부르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 우리로 벌써 썩어 냄새나기 시작하는 몸을 일으켜 ‘나오라’ 하신다. 상념이 깊고 판단이 굳어져 이미 나름의 결론을 내린 상태로 이를 신앙이랍시고 붙들고 사는 죽은 믿음과 다를 바 없는 우리에게 말이다. 저가 누워서도 ‘~하였더라면’ 하는 식으로, 사흘만 일찍 오셨더라면 하고 판단하고 미루고 포기하였으면 어땠을까? 이내 예수님은 우리로 우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신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 먼저는 저 스스로 일어나 발이 묶인 채로 동동거리면서도 나와야 하고 다음이 곁에서 다가가 저를 풀어주어야 한다. 이는 만고의 진리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의지를 함부로 다루시지 않는다. 임의로 대하지 않으신다. 오래 참고 또 기다리시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결단하고 일으켜 묶인 채로 나와야 한다.

 

앞서 주께 맡긴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나는 실토하였다. 이 또한 주의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인 것을 인정하였다. 어제는 그런 나에게 이 한 구절의 말씀이 크게 다가왔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이는 예수님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어느 인생이 수고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겠나? 이쯤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수고하고 무거움’을 알겠다. 몸은 점점 여의치 않고, 주변의 누가 어떤 일로 고통당하고, 병들고, 힘들어 신음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젊을 때, 한참 괜찮다고 여길 때는 미처 듣지 못하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러할 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는 말씀은 새삼스러울 정도로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조성하신 이시다. 우리를 지으시고, 그에 앞에 이 모든 구원사역을 설계하신 이시다. 지금도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개개인의 ‘수고와 무거움’을 다 아시고 대신 져주시는 이시다. 그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30-31).”

 

저는 누구신가? 할 수 없는 게 없는 이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우리 안에 슬픔이 가실 날이 없지만 주의 능한 팔로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저는 누구신가?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는 이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저는 누구신가? 나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하시는 이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저는 누구신가? 어제도 오늘도, 날마다 나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분이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68:19).” 그런 이에게 다윗은 우리의 짐을 맡기라고 한다. 저의 혹독했던 인생을 돌아보면 차마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는 게 희한할 정도이다.

 

다윗은 일찍이 근심이 끊이지 않아 평안할 날이 없었다.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55:2).” 몸과 마음은 늘 아파서 그 순간마다 죽음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4).” 심리적으로 두렵고 떨린다는 말이 얼마나 공포를 주는지 나는 조금 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5).” 삶에서 그러한 지경일 때, 훌훌 털어버리고 비둘기처럼 날개가 숨을 수 있다면 멀리 도망치고만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인가?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6).” 늘 주변에서 나를 두고 뭐라 하는 시선과 외면과 강포가 서로 분쟁하여, 저들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9).” 그것이 얼마나 나를 압박하고 나를 속이는지 모른다.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11).” 실제 괴롭게 하는 게 원수가 아니고, 남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 가까운 친구요 내 가족들이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12-13).” 일일이 열거하다보면 저의 생이나 나의 생이나 다를 바 없다. 모든 인생은 구구하고 절절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져 못 일어날 것 같다. 온통 다 우리가 짊어지고 살고 있는 짐들 때문이다.

 

이를 “네 짐을!” 스스로 지고 어쩔 줄 몰라 힘에 겨워서 ‘만일 ~하셨더라면’ 하는 식으로 신세한탄이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고,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22).” 다윗은 누구보다 처절한 삶을 살았다. 왕으로 탱자탱자하며 살던 사람이 아니다. 왕이 되어서도 숱한 어려움은 물론 아들 압살롬에게까지 쫓겨나 도망가야 했던 신세다. 그런 그가 먼저는 자신에게 이른다. ‘내 짐을 여호와께 맡기자. 저는 누구신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이시고, 나를 불쌍히 여겨 긍휼히 대해주실 이시며, 나의 짐을 날마다 대신 지시며,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실 이시다. 그런 그가 나를 영영히 붙드시고 요동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나로 의인되게 하신 이가 나로 흔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나의 죄로 죽어 마땅한 자를 죄 없다 하시며 용서하시고, 주의 자녀로 먼저 맞아주시는 아버지시다. 그분께 먼저 맡겨야, 의지하게 하신다. 먼저 아직 묶인 채로 나올 때, 모든 것을 동원하여 도우시는 이시다. 이는 아주 간단한 원리인데 왜 이토록 불가능한 것일까? 믿고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믿고 맡긴다는 게 말이 쉽지 그게 어디 내 의지로 되는 일이던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미덥지가 않아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맡긴다고 하면서도 번번이 확인하고 의심하며 보충할 다른 것을 기웃거리며 찾고 의지하고 있지 않았나? 오늘 시편은 그런 내게 일갈한다.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47:10-11).” 여호와 나의 하나님은, 오직 주를 경외하는 것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을 기뻐하신다. 나의 수고와 나름의 노력을 기대하시는 게 아니다. 어떤 성과나 어떤, 남들과 같은, 어떠어떠한 모습을 바라시는 게 아니었다. 오직 나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고 주만 바라기를 기뻐하신다! 그렇게 쉬운 걸 나는 그처럼 어려워하고 있으니… 그저 믿기만 하고 맡기기만 하면 될 일을…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오늘도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무엇무엇 하셨더라면!’ 하고 한탄과 불평만 늘어놓기 일쑤다. 다윗은 근심으로 평안을 사모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심히 아파서 죽음 너머의 위로를 알게 되었다. 두렵고 떨리는 공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며, 날개가 있다면 도망치고 싶은-죽고 싶을 정도로 힘에 겨운 나날이어서 더욱 더 살게 하시는 이의 뜻을 살피었고, 자신을 속이고 괴롭게 하던 것이 원수가 아닌 친구여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게 되었다. 그런 그의 외마디 비명 같은 놀라운 진리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맡겨, 버리라! 맡겨서, 버려라! 이 아침, 나는 또 한 번 주의 놀라운 음성에 깨닫는 바가 크다. 마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그럴 자격도 아무런 준비도 실력도 갖추지 못한 나를,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3).” 그러시는 저는 대체 누구신가?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4).” 이 모든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다 계수하시고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시는 이시다.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5).” 그는 나로 겸손하게 하시고, 감사와 찬송으로 오늘도 맡기신 하루를 살게 하신다. 그리하여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7).” 저는 오직, 나로 하여금 찬송하고 감사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저는 오직, 나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게 하시려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