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전봉석 2021. 3. 21. 06:04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러자니 저런 것 같고 저러자니 이런 것 같다. 마음이 어렵고 복잡할 땐 가만히 놓아두면 저가 알아서 길을 찾는다.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 위의 마음이 그러했을 테고, 앞서 장구한 세월을 무던히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손길에 있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려움이다. 처음 사람 아담의 마음에 하나님은 두려움을 두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는 손에 들려주시는 지팡이와 같다. 그것을 짚고 의지할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며 보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들어 누구를 해할 수도 있다. 이에 사탄은 교묘하게 이를 들추어 악용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두려움에 두려움을 더하면 완악함이 되고 두려움에 두려움을 덜어내면 게으름이 된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공연히 더해진 마음은 스스로를 옴짝달싹 못하게 짓누른다. 또는 두려움이 더해져 게으른 자가 된다.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0-21).” 그렇다고 저는 이탈하지 않았다. 주인의 과수원을 뛰쳐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경건의 능력을 실천하지도 않았다. 예배도 하고 말씀도 보고 주의 길을 가는 자들과 같이 하면서도, 그릇된 두려움으로 미적거리거나 뭉개고 있기 일쑤다. 그러는 자신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늘 두둔한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실은 싫은 것이다. ‘당신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저의 말이 어쩌면 부정적인 두려움의 정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은 경외심의 초석이다. 이 두려움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주가 명하시는 길을 가고, 일생을 방주를 짓기도 한다. 같은 두려움이나 서로 다른 이유로 작동하는 것은 성령으로 행사되는 두려움이 있고 사탄의 꾀로 더하거나 덜어지는 두려움이 그 차이다.

 

엄연히 성령도 우리 안에 두려움을 행사하심으로, 말씀을 듣고 저들이 찔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옥을 지키던 간수들이 다급히 묻기를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고 방도를 구한다(16:30). 하나님의 방식은 먼저 죽이고 나중에 살리신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먼저 때리고 나중에 싸매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기본적으로 복되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말씀으로 더해지는 두려움으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가야 할 길을 얻는다.

 

이를 바울은 정리하면서 처음에 우리는 모두 ‘종의 영’을 받지만 나중에는 이를 ‘양자의 영’으로 받는다고 하였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영으로는 해야 할 일이 의무로 여겨져 때로는 억지로 한다. 그 일에 억지로 순종하는 종의 영이지만, 양자의 영 곧 아들의 영으로는 즐거움으로 그 일에 참여한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로 삼는 것이다. 종은 삯을 위해 일하나 아들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두려움은 최소한 주와 함께 있다는 증거다. 가룟인 유다도 예수와 함께 있었고, 한 달란트를 받은 자나 한 므나를 그대로 숨겼던 게으른 종들도 어쨌든 주인의 포도원을 떠나지는 않았다. 두려움이 온전하게 작동하지 못하면 이내 우리로 범죄하게 한다. 아담은 기어이 선악을 알게 하게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껏 출애굽을 하였으나 광야에서 우상을 섬겼다. 그릇된 두려움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체할 무엇을 둔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그런 저들의 특징은 수시로 원망과 불평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경건한 두려움이 순간순간 불경건한 두려움으로 변하여 우리를 충동한다. 그럼 금세 우리는 공격적인 성향을 띠거나 소극적인 성향을 띠면서 하나님을 오해한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23:27).” 곧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두려움의 존재여야 한다. 이는 마땅하여 세상이 우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이에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신 2:25).” 한데 그런 우리가 우리 안의 부정적인 두려움에 시달리고는 꼴은 우습다.

 

이에 오늘 본문은 그러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늘 경외함의 기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감정의 수준은 놀람과 경탄뿐이다. 이내 불경건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스스로 자기를 숨긴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누구와 통화하다 저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나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주저하는 데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도는 까닭이었다. 아브라함도 기근으로 인해 두려움이 더해져 슬금슬금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모든 주저함과 게으름의 원인은 두려움이다. 하지만 모든 용기와 확신도 두려움을 기초로 한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가장 친밀한 감정이다. 이것으로 누구는 더욱 주를 바라고, 이것으로 누구는 이내 예수를 팔았다. 경건한 두려움은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 이를 용서를 구한다. 처음 사람 아담이 그랬으면 어땠을까? 통회하고 자복하는 자를 하나님은 버려두실 리 없다. 한데 저들은 공통되게도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라!” 하였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1).”

 

죽어도 자신은 억울하다고 여기는 게 불경건한 두려움의 특징이다.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히 12:20).” 곧 스스로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떠나지도 못하면서 순종하지도 않는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완고함이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 그 일을 수행하지도 않는다. 금지된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이처럼 노예로 삼는다.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두려운데, 어찌할 수 없는 게으름으로 밖에 사자가 있다고 핑계를 댄다. 늘 보면 저들의 특징은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저 다 현실 탓이다. 이는 그 안에 믿음이 없음이다. 그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주님과 같은 배에 있으면서도 풍랑으로 죽을 맛인 게 저들의 두려움이다. ‘여기까지’ 돌보심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감사하기보다 앞날의 염려로 미적거리는 자들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하고 꾸짖으신다. 결국은 염려의 파도에 휩쓸려버리기 일쑤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수시로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두려움이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또한 양자의 영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두려움의 역설은 온전히 믿는 자의 특권이다. 가끔은 내가 못 견딜 때, 어제도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어떤 불안으로 짓눌려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었다. 그럴 때면 나의 묵상은 헛된 것 같고, 기도도 신앙도 모두가 어리석은 것만 같아서 속을 끓였다. 하지만 그래서 또한 더욱 주를 바라기도 하였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잠깐 그와 같은 두려움에 대하여 언급한 뒤, 종일 나의 생각은 ‘두려움의 역설’을 두고 생각하였다. 우리를 인도하는 은혜의 의지가 두려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겠다! 자신이 죄인 됨을 알게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14).” 하는 자의 자리에 있던 나를 두려워할 줄 안다. 이를 통해 누구는 그릇된 길로 가고 누구는 온전히 주를 경외하는 자리로 간다. 누구는 더욱 주를 바라고 누구는 더욱 자신으로 완고하여진다. 두려움으로 마음의 노예가 되면 순간 말씀이 어려워진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이스라엘 백성의 이와 같은 증상은 그릇된 두려움의 단적인 예이다.

 

아담이 그 때문에 숨었고 이스라엘이 그것으로 더욱 반역의 길로 갔다. 오늘 우리의 삶도 전혀 다르지 않다. 아예 주님과 상관없는 부류의 사람들은 저들 속에 두려움도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이 사는 모습은 대단해보인다. 거침이 없다. 원하는 대로 산다. 종종 저들이 부럽다. 그러다 의인이 미끄러진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저들은 다만 저들의 길을 갈밖에. 우리 안의 두려움이 저들과 다름을 알게 하는데, 그래서 성령이 주시는 양자의 영으로 경건한 두려움은 주를 경외하게 하게, 미숙할 때는 종의 영으로 언제든 그 두려움의 실체는 고달픈 것 같다. 이를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성경은 바른 길을 제시하기를,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이것이 우리의 지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곧 예수님은 일러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조금 과정하면 그래서 나는 나의 불안까지도 사랑한다.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나를 돌아보며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더는 그릇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한다. 두려움으로 나는 죄를 깨닫게 하심을 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오늘 본문은 그 마음을 뒤집으면 사랑인 것을 알게 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러므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 이에 본을 보이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5).” 이로써 오늘 시편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시 148:13).” 나의 할 일을 알게 하신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