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전봉석 2021. 3. 23. 06:12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가끔은 누구의 안타까운 소식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내 안의 말 못할 사연을 두고 혼자 끙끙 앓는 일도 어렵다. 이 땅에서 우리는 언제나 위협을 느낀다. 시온은 수시로 공격당하고 어려움들은 때때로 연합으로 공격하는 것 같다. 어제는 시편 48편을 두고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시온을 생각하였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1).” 시온은 하나님의 성이고 거룩한 산이다. 영적으로는 우리 믿는 자의 처신이며 삶의 형태다. 우리가 우리를 돌보는 까닭은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공격당하고 위협을 느낀다. 예수님은 이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하심으로 정리하셨다. 곧 우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세상에서 사느라 겪는 어려움 그 이상의 것이다.

 

어떻게든 사탄은 우리로 주를 멀리하게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다. 저가 거짓말쟁이인 것을 일찍이 예수님은 지적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저는 늘 먼저 오거나 늦게 온다. 열렬하게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것 같을 때 저의 열심이 먼저 들어와 있거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며 견디는 것 같을 때 저는 늘 나중에 슬그머니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한다. 누가 그처럼 열심을 다해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을 지켜 믿음 안에서 굳건한가 하였더니, 일순간 부모를 잃고 하나뿐인 형제까지 고통에 처하자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합리적인 의심이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나에게 이러실 수 있겠나?’ 회의가 밀어닥치면 영락없다. 항상 빌리그레엄 목사와 주의 일에 전념하던 텀플턴 목사는 북아프리카의 실상을 알리는 사진 한 장에 무너져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을 자부할 수 없다. 어제는 문득 그러느니 우리 안의 두려움을 신뢰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안에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두려움이 작동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의 올바른 신호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해서 더는 어려움도 없고 고통도 없고 그 속에 두려움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은 우리로 온전히 주를 경외하게 한다. 물론 사탄은 이를 거둬갈 수 없다. 이미 생성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렇다고 우리는 천하무적인가? 그렇지가 않다. 시온은 날마다 위협을 당하고 사탄은 더더욱 안달을 부린다. 어떻게든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저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럴 때 내가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신앙으로는 견딜 수가 없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는 확실한 증거여서 우리는 이를 호흡으로 증명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다! 이와 같은 전제의 말씀은 흔들리면 안 된다.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설령 저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더는 내게 희망이 없다 해도, 나는 그에게 나의 행위를 아뢰겠다. 곧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그 너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뢰하는 것이다. 왜? 저는 할 수 없는 게 없으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그러는 그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하셨고, 일으키셨고, 하늘 보좌에 같이 앉게 하실 것이며,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언제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날마다 내 짐을 져주시는 분이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68:19).”

 

그러니 그런 그분께 내 짐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이런 소릴 하고 있는 다윗은 그의 생을 통틀어 이런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근심이 늘 저에게서 끊이지 않았고,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2)”, 늘 죽음이 위협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으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4).” 그뿐인가? 심리적으로도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5).” 그러니 차라리 도망치고만 싶은 삶이라,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6).” 모든 어려움이 일순간 나만 못 살게 구는 것 같을 때,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11).” 그런 나를 질타하고 정색하며 괴로움을 더하는 게 남들이 아니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13).” 그러니 그런 그가 할 소린가? 다윗은 그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이는 참 두려움이 거짓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파기할 수 없다! 설령 아브라함이 나의 조상이 아니라 하고, 야곱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여호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아들이라 하신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가령 내가 또 죄를 짓고 범죄 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끊으시지 않는다. 이는 오늘 성자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그래놓고 어떤 이유를 들어 없던 일로 하신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부정하시는 일이 된다. 말씀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것 같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가 있다. 사탄이 노리는 틈새는 그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런데도 사탄은 우리로 주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욥 22:10-11).”

 

이는 늘 시온을 향한 역습이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얼까? 먼저는 오래 전에 놓여나서 자유롭게 된 죄의 올무에 다시 걸리게 한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13:26).” 예전에 끌려 다니고, 그것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데, 도로 그 일에 매달리게 한다. 돈돈거리고, 사람을 찾고, 위로를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얻으려고 기웃거리게 한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신세가 참 처량하게 되었다. 다윗도 이로 고통 중에 빠지기도 하였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하여 간다는 것은 수시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소리다. 주의 성산, 시온은 언제든 공격의 대상이다. 이는 마치 도로 모든 게 허사가 된 것 같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애 3:55).” 도로 발이 묶이는 것 같다.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욥 13:27).” 언제든지 우리는 공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신 28:24).” 그러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스스로 자부하던 믿음이나 신앙은 허울뿐인 것 같다.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끝장이 난 것 같다. ‘양자의 영’은커녕 도로 그 무서운 ‘종의 영’을 뒤집어 쓴 것 같다. 하나님이 너무 어렵게 여겨진다. 믿음으로 사는 게 모두 허상인 듯 헛된 것만 같다. 보란 듯이 곁에서 가까운 친구들은 ‘그러게 적당히 믿어!’ 하면서 실의 젖은 우리의 손을 이끈다. 저들은 만사가 형통한 것 같다. 그 되는 일이 모두 행복해 보인다. 정말이지 예수 안 믿고 사는 자들이 더 잘만 산다. 그러다보면 죄책감에 다시 붙들리게 된다. 이런 어려움이 모두 나의 죄 값으로 치러지는 일처럼 괴로움을 더한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시 40:12).” 도로 환난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애 1:3).” 그런 나를 내 곁의 사람들은 조롱한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3:14).”

 

그러한 위기에 처하는 주의 자녀들이 내 주변에도 왕왕 있다. 어제는 누구 이야기를 듣다 저의 엎치고 덮치는 어려움 앞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그 일로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저의 심경 앞에 뭐라 해줄 말이 없이 숨이 찼다. 그런데 일찍이 성경은 이를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 곧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의 확신이다. 스스로 믿는 믿음의 정체다. 이를 의심하지 않는 자기 의다. 이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지만 성경은 강조하셨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많으리라! 많으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오금이 저린다. 나는 종종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뭐라 말로써 위로를 해야 할 때, 연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주님, 하고 내 눈에 먼저 고이는 눈물로 나는 종종 입을 다문다. 그러다가도 불쑥, 아내를 핀잔하며 또는 누구를 질타할 때 마치 내가 뭐나 된 것처럼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놓고는 그 말에 두려워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도대체 나란 사람은 이처럼 하찮고 역겨울 따름이다.

 

그런 나에게 오늘 주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곧 내 안에 이는 두려움으로 나는 주를 사랑한다?! 나의 확신도 나의 굳건한 믿음도 나는 의심한다. 내가 나를 자신하지 못한다. 나는 오직 저의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가지일 뿐이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 이는 언제나 주 안에 거하는 일일 수밖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나는 하루에도 수 골 백 명의 나를 마주하며 사는 것 같다. 이처럼 말씀을 끌어당겨 묵상할 때는 자신하던 내가 일어서기 무섭게 두려움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누구의 어려움을 들으며 성경으로까지 뒷받침하며 말로다 위로하던 내가 조금만 무시당하는 것 같을 때면 언제든 공격적으로 악을 토하며 싸울 기세다. 아! 정작 나의 시온은 나로서 위협을 당하는 꼴이 된다. 그럼에도, 도무지 그 지경밖에 안 되는 나인데도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이보다 더 끔찍했던 나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품에 안으시고 함께 하신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아니면 난, 단 하루도 온전히 살 수가 없다. 주 없이 살 수가 없다. 은혜 아니면 살 길이 없다. 내가 혐오스러워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나로, 오늘도 아침에 나를 일으켜 앉히신 이에게 영광과 찬송을! 언제든 버려진 가지처럼, 양자의 영으로 부여 받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허덕거리기 일쑤인 나를 오늘도 어김없이 사랑하시는 이에게 경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아, 나는 오늘 이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감미로울 정도로 다행이고 안심이다. 이는 내가 취하여 행하는 사랑이 아닌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9-10).” 그래서 나는 죽어도 말씀, 말씀 하며 성경으로만 붙들려 살기를 소원한다.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가장으로서의 위신도, 남들 앞에서 빙충맞기 이를 데 없다 해도 부디 말씀만 붙들 수 있다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이 기쁨을 잃고 싶지 않다. 그것으로 너를 사랑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무슨 수로 내가 나를 사랑하겠으며 내 곁의 지긋지긋한 현실을 사랑할 수 있겠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 이런저런 어려움과 마음의 짐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여호와 나의 아버지께 맡겨드린다. 이는 결코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26-27).”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