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우리로 ‘복 있는 사람’이라 하시는 데 놀랍다. 더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려고 하는 마음을 더하심이 말이다. 이로써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게 하심이 은혜이다. 이어서 보니 새롭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아, 실은 우리가 얼마나 평안을 찾고 있었는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 안의 평안의 출처는 ‘주 예수 세상을 이기시었다.’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 이는 견고한 언약의 마침이며 새로운 영원의 시작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비록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모두가 나를 부정한다 해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다(사 63:16). 이를 위하여, ‘예수 다시 사셨다.’
이에 우리로 복이 있다 하시는 데서 감사할 뿐이다. 며칠째 시편 48편을 두고 씨름하듯 묵상한다. 묵상이란 사자가 입에 물고 놓지 않는 먹잇감 같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이때에 누가 와도 빼앗기지 않으려 움킨 것을 쥐고 게걸스러울 정도로 집중한다. ‘그들의 떠듦으로 굴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온 산은 여호와가 강림하심으로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이로써 자기 요새를 알리신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시 48:3).” 세상에 그 수많은 궁중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그의 설교 말씀 같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 16:1).” 세상은 우리를 공격하고 나 역시 나에게 위협이 되기 십상이지만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
우리가 예수를 본 적이 없으나 그때와 같이 함께 계심을 아는 까닭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것이 구원의 증거다. 내 안에 ‘양자의 영’이 함께 하심이다. 더는 잃을 수 없는 나라다. 그렇듯 시온이란 저가 곧 우리의 요새가 되심이다. 이는 견고하며 영원한 여호와의 도성이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시 48:8).”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변함이 없다.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13).” 그의 성벽, 곧 우리 안에 두신 요새의 든든한 터를 살펴 후대에 전해야 한다. 대체 무엇을 말인가?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내 안의 요새에 대하여는,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50:2).” 저가 빛으로 오셔서 내 안의 어둠을 물리치신 일이다. 어둠을 숨기려 그토록 기를 쓰고 살았던, 나의 유년과 청소년시기를 생각한다. 어느 아이가 중2가 되었어도 구구단도 못 외운다. 지진아에 숫기 없는 녀석은 번번이 책을 펴놓고 앉아서 운다. 그런 아이를 두고 아내는 답답해하면서도 누구보다 그 애에게 마음을 쓴다. 종종 녀석은 나를 보고 웃는다. 나 또한 장난스런 표정으로 아는 체 한다. 순진하고 갈급한 눈을 가졌다. 며칠 전에는 그 엄마의 방기에 대해 아내는 격분하였다. 어떻게 애를 저 지경이 되도록 나 몰라라 할 수 있냐며 혀를 끌끌 찼다. 저이 또한 먹고 사는 일에 혼신을 다하느라,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고단함에 대하여는 더 말해 뭐하겠나? 이상하게도 저 아이를 볼 때면 자꾸 옛날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안 됐고 불쌍한 마음이 전부이다, 오늘에 이르러 주께서 그런 나를 어찌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단단히 붙드셨는가를 실감한다. 저는 나의 요새이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59:16).” 이를 아는 영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이다.
모두가 나를…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애 2:15).” 비웃고 조롱거리로 삼을지라도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16).” 그렇듯 혀를 끌끌 차며 마치 끝난 이야기처럼 머리를 돌린다 해도, 주는 나의 요새이시다.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 저는 결국 나의 ‘견고한 곳’이라.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이제 와 생각하면, 주가 아니시면 누가 나를 붙들어 새사람을 만드셨을까? 저 아이가 공부하며 우는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자신 때문이다. 하기는 싫고, 알아야 하는데 뭔 소린지 알 길은 없고… 아내는 녀석과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답답하다며 속이 터져한다. 풋, 하고 나는 자꾸 웃게 되는 것이 나를 두고 누가 또 그러했던 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들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해 울기도 했던 일이라…. 마음에 두시는 아이를 주 앞에 아뢴다.
이는 곧 우리 안에 주의 전이 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그러니까 저가 나의 시온이시고, 요새이시고, 거룩하신 성전이신데… 내가 저의 몸이라 하심은 내가 저의 요새요, 거룩한 성이 된 것이다. 그렇게 내 안에 저 아이를 두시고, 마음이 쓰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일이 어찌 내가 의도하는 일이겠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그것으로 말씀을 보고 책을 읽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저를 두고 주께 아뢰기도 하면서,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0:10).” 나로 그 일을 증거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렇게 저는 나의 요새가 되신다.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14).” 이것으로 나를 뽐내는 일이 아니라, 저 아이 못지않던 나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어느 가까운 훗날 저 아이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과 경배가 드려지기를.
내 안의 이 복은 <하나님의 보물>이다. 복된 은혜로 주를 경외함이다. 단지 무섭고 두려운 그 이상의 경탄이고 놀람이다. ‘어찌 나 같은 것을!’ 하고 놀라워한다.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경외감은 <언약의 소금>이다. 언약은 말씀이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나로 그냥 있을 때는 뻣뻣하여 서걱거릴 뿐인데, 소금-말씀에 절여 숨이 죽으면서 모든 양념을 흡수하고 버무려져 더욱 깊고 오묘한 맛을 내게 된다. 즉 내 안에 두려움을 두시는 까닭은, 때로 그것 때문에 기력을 잃고 모든 하는 게 빙충맞은 것 같으나 마음에 치고 행함에 치는 <언약의 소금>이었다. 내가 나로 있을 동안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를 나는 숨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저 아이도 눈에 들어오고 우리 마음에 두심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게도 된다.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행동은 온순하여지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남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된다. 마치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산상수훈의 ‘복 있는 자’로 버무려지는 것 같다.
심령은 점점 가난한 자가 되어 주가 아니면 나의 허기를 달랠 수 없어, 돌아보니 천국이 내 것이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는 자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저를 안타까워하다 내가 위로를 받는다. 온유한 자로 단순히 성격이 온순한 자가 아니라, 주와 함께 함으로 말과 행동이 급할 게 없어진다. 주어진 땅, 기꺼이 오늘의 현실로 기업을 삼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더 나은 땅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저 한 영혼으로 마음이 쓰여 속이 타는데, 그것으로 배가 부르다. 곧 누구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그리하여 더욱 생겨나는 욕심이 마음이 조금만 더 청결하였으면 좋겠다. 치우고 치워도 내 안에 쌓여지는 온갖 나의 나 됨으로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르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화평으로 누구에게 화평하게 한다. 이것이 나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일깨운다. 다들 죽기 살기로 기를 쓰며 사는 이 땅의 추구에서 벗어나, 때론 황당하게 여겨질 정도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내 안에 이미 천국이 있다. 그렇게 때론 욕을 먹고 누구의 싫어함을 당하고 거슬려하며 멀리함을 받을 때 오히려 복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3-12).
곧 우리 안에 두시는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소금이 되어 나를 절인다. 오만하고 완고하여 뻣뻣하기 이를 데 없던 나를 숨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맛을 더해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으로 버무려서 또한 누구에게 먹게 하신다. 마치 주님이 나에게 먹게 하시는 자신의 살과 피와 같이 말이다. 말씀이란 그처럼 놀라운 것이어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때론 말할 수 없는 말들로 인해 내 안에 떨림을 주체할 수 없어, 가슴은 답답하고 숨은 몰아쉬며 인위적으로 안정제를 삼켜야 할 정도로 나는 연약할 뿐이지만…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면서도 나의 이성은 현실로 돌아오면서 가슴부터 답답하여 숨을 길게 들이 쉬면서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이와 같은 말씀으로 막중한 사명을 느끼며 두려워하다 기뻐한다. 나 같은 걸 들어 이와 같이 사용하시는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그리하여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고 보혜사를 내 안에 두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저는 나의 요새시라. 그가 나로 하여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 알게 하시고 두려워 경계하게 하심으로 이를 또한 전하여 알리게도 하신다. 그렇게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4-15).” 그렇게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16).” 지금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다 안다. 내 안에 두시는 경외함이란 이와 같이 놀랍고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곧 우리의 근심은 기쁨이 되리니, 죽어도 죽는 게 아니었고, 성경은 늘 이르시되 잔다! 하신다. 우리 모두 저 요단강을 건너가서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이 기쁜 소식을 어찌 무덤덤하게 받고 말겠나? 오늘 시인이 일갈하는 것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