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1-12
일찍 눈을 뜨고 말씀 앞에 앉았다. 친구의 부친이 급격히 안 좋아지셔서, 전화 저편에서 친구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저를 위해 기도하였다. 안정제를 타서 먼 길을 걸어서 오다 묵상하였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건강할 때, 나름 괜찮다고 여길 때, 우리는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뭐라도 할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고 찬송하고 언제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혜자는 이를 일깨우고 있었다. 더는 곤고한 날이 이르렀을 때는 아쉬움뿐이다.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에는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뿐이라 감사와 찬송이 쉽지가 않다.
오늘 예수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6).” 오로지 주님의 관심은 우리들뿐이다. 일찍이 지혜자의 아버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은 다음과 같이 교훈하였다. 너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다른 말로 하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곧 그의 말씀을 늘 상고하고 이에 그 뜻을 행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한데 우리가 ‘청년의 때’에는 그 시절이 좋아서 ‘진노’를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주의 진노는 우리의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죄의 결과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이를 피하실 수 없었다. 이에 우리의 복이 그럼 무엇일까?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일찍이 수천 년 전에 다윗은 이를 경고하였다. 이를 바로 그 다음 세대인 솔로몬이 깜빡하고 자신의 ‘청년의 때’를 경솔히 보냈다. 그런 그의 참회는 이처럼 나로 하여금 아침 일찍 눈을 뜨게 하였고, 친구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마음을 다잡으며 주의 말씀 앞에 앉게 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마음 같아서는 다들 편히 데려가고 싶으시나 세상에 남겨두셔야 한다. 이에 세상에 남을 우리를 위해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을 떠날 이를 안타까워하는데, 우리 주님은 우리로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님을 일깨우신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마치 좀 더 남아서, 몇 년을 더 세상에 사는 것이 복인 줄 알지만… 그 세파에 시달려야 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무엇이 복인가를 알게 하신다. 곧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우리의 영혼이 죽음이라는 관문을 열고 영광으로 들어가는 복됨이다. 주님은 늘 죽음을 ‘잔다!’고 하셨다. 이에 우리의 영생은 이 땅에서의 생으로가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그러니 앎으로, 우리는 아는 것으로 무엇을 구하며 위하고 살았던가?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아직 기력이 있고 정신이 멀쩡하고 돈도 좀 여유가 있다고 여길 때, 부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 오늘을 사는 동안 무엇을 위하고 준비하며 고단한 일상을 참고 견뎠는지. 그저 늘 사느라 급급해서 사는 날의 즐거움으로 족한 줄 알다, 홀연히 우리의 장막성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어찌할까? 가정 예배를 드리는데 손위 처남 누가 죽었다는 부고를 알렸다. 저와 동갑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양이었다. 곧 육십을 앞두고 은퇴를 준비하다 불현듯 저의 선택이 그 인생의 허망함을 짐작하게 하였다. 어떠했기에 스스로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저의 소식 앞에 망연자실하였다. 사람은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어리석은지…. ‘청년의 때’ 곧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는 그처럼 기고만장하니 우쭐하며 뽐내고, 대단한 인생인 줄이나 알고 스스로 자부하며 살았을 텐데. 하필이면 약을 타러 먼 길을 걸어갔다 걸어오면서 중간 중간에 허리가 아파서 나는 양지바른 곳에 서서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구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었다.
돌이켜 주를 바라고, 사는 날을 소중히 여기되 전부로 삼지 않게 된 것이 은혜인 것을 생각하였다. 친구에게는 뭐라 위로하기에 나 역시 마음이 어려워서 말을 더듬으며 뭐라 일러줄 말을 입안에만 머금고 있었다. 자식 된 도리로, 또는 그 일을 겪어야 하는 가족들로서의 슬픔이나 상심은 뭐라 해도 위로가 되겠나만! 죽음을 마냥 슬퍼하는 일은 안 믿는 자들이나 할 일이다. 곧 우리가 다 주 앞에 마주하고 설 텐데, 그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의 주의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면… 이 고단하고 어려운 장막의 나날들에 대하여는 오히려 홀가분한 일이라. 남겨질 가족들에 대하여는 이런저런 염려와 아쉬움이 없지는 않겠으나… 그리하여 오늘 주님도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신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우리를 위하시고 두둔하신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하시는 대목에서 실상 아직 저들 직계 제자들의 모습은 어림도 없고, 오늘 우리의 영적인 수준도 참혹할 정도이지만, 주님은 알고 계셨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 알게 하실 것이고, 이를 위하여도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그러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아, 우리는 아버지의 것이다. 과연 ‘청년의 때’에 우리는 이를 깨달아 창조주를 기억하는가? 나는 신호등이 몇 번 바뀌는 동안에도 양지바른 곳에 서서 지팡이를 짚은 손을 뒤로 하고 허리를 펴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할 수 있는 것이 은혜였구나!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는 것이로구나! 바로 이 경외심이라는 은혜를 너무 쉽게 얻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14).”
두려움이 무조건 주를 경외하는 데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사탄이 이를 위장하여 주는 두려움도 있다. 저의 두려움은 우리로 더 무장하고 단단히 그 고집을 꺾지 못하게 한다. 스스로를 자부하며 ‘괜찮아!’ 하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속이게 만든다. 그러다 어제 손위 처남의 동기 가운데 누구처럼 고작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선택이 그뿐이다. 세상은 본래 그리 유도한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9-30).” 아직 살만하고 스스로 건재하다고 여길 때는 그리 경솔하게 군다. 하지만 우린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16:6).” 곧 우리는 주를 두려워할 줄 앎으로 죄악에서 벗어나 깨끗하여지기를 원한다. 인자와 진리로 인함이다. 경외함으로 악을 멀리 하게 된다. 예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나를 돌아 세운다. 종종 나는 누구와 이야기하다, 이제들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 아픈 데도 늘고, 이런저런 염려가 두려움으로 옥죄는 것일 텐데… 부디 혼자 있는 연습을 부탁한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붙들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게 근데 생각처럼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독서란 게 마음먹는다고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듯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여전히 그럴 겨를이 없다. 누구는 심장이 안 좋다 하고, 누구는 어떤 어려움으로 공황을 호소하고, 누구는 당장 돈 얼마에 전전긍긍하느라 말씀 앞에 이끌릴 겨를이 없다. 그 와중에도 누구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만학의 길을 선택하고, 누구는 ‘영혼까지 끌어 모아’ 내 집 한 칸 마련하는 데 남은 생을 다 투자하였다! 그래놓고는 여전히 장가들고 시집가고, 밭도 사고, 다섯 겨리나 장만한 소를 건사해야 해서, 거절한다. 저들은 하나 같이 ‘다음에!’ 하는 말로 그런 소리에는 관심을 두기 싫어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곧 무너질 판에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나 듣고 만다. 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7).”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으로도 얼마나 큰 다행인가? 이와 같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양지바른 곳에 서서 한참을 더 친구를 생각하였다. 위하여 기도하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온갖 사연과 이유들로 분주한 걸음들이었다. 저마다의 ‘청년의 때’에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비로소 아는 것은 이 마음이 내 마음으로가 아니었다. 우리의 의지로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가 더하시는 새 마음으로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어르신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25-27).” 그리 할 수 있게 해주심이 은혜였다. 이를 위하여 오늘의 고통과 염려와 수고를 조성하심인데, 저마다 당장의 고통과 염려와 수고를 어떻게든 모면하려고만드니… 별 수 없는 노릇인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마 9:16).”
기어이 벗어야 하고 아름다운 세마포로 갈아입어야 한다. 주가 그리하신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3-5).” 반드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기도하신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우리를 보전하사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말씀을 주셨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 세상은 우리로 슬프게 하고 노엽게도 하지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오늘의 어려움이 우리로 이롭게 하는 것은 우리로 주를 경외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허용하신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패했던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금세 또 어려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사는 게 허다하여,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0-11).” 오늘 우리의 이 일은 우리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그것을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심으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 믿음을 더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 믿음으로 다시 한 날을 산다. 여기서의 이 날을 두고 주 앞으로 가시는 이를 슬퍼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그야말로 무엇이 불쌍한 일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우리로 아직 이 땅에 더 남게 하심은 그 목적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진정한 우리의 바람은 주와 함께 영원한 주의 나라에서 평안을 누리며 찬송 중에 거하는 일이다. 부디 친구가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직 더 살아야 하는 자신의 남은 생을 주 앞에서 온전히 헌신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다시 걸음을 옮겨 교회로 올라오면서 고단한 하루가 무엇을 항변하는지를 들은 것 같았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 오늘 주님의 기도가 우리가 주를 더욱 바람으로, 아직 ‘청년의 때’에 부디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시는 말씀에 응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응하는 삶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