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3:6
우리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다. 그 무엇이 나를 에워싼다 해도 그것이 나를 어찌할 수 없다. 당당히 예수님은 당대의 권력 앞에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말씀 앞에 가만히 안도한다. 시인과 같이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된다. 머리로는 말이다. 종종은 가슴으로도 느낀다. 뜨거운 감사와 찬송이 온 몸을 이끌기도 하신다. 실은 그게 늘 지속적이지를 못해서 잠시 동안 괜찮다가 또 다시, 염려는 나를 쥐고 흔든다. 종종 누구와 통화를 할 때면 내 자신이 민망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주께 맡기자, 말씀 붙들고 힘내자, 하는 소릴 자주 하지만 정작은 나야말로 그것이 병적으로 어려워서 안정제를 먹고 인위적으로 진정을 시키며 살고 있지 않던가?
그러니 우린 누구도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성경의 그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도 염려 없이 거뜬하게 한 생을 승리하고 산 사람은 없다. 다윗은 자신을 향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저 또한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5).” 그러니 저나나나 다를 게 없다. 바울은 그럼 아무렇지 않았나? 저 또한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한 것 같이 힘들어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 에바브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 2:27).” 그런 거 보면 지혜자의 말마따나 인생 다 그 평생이 근심과 수고뿐이라!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나는 나의 민망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도 나의 모지라고 연약함을 알면서도 서로가 기도를 부탁하며 합심하는 까닭은 내가 좀 더 낫다고 여겨 그리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도 이를 알고 있으셨다! 염려가 없을 수는 없지만 끌려 다니지 않을 수는 있다. 염려 없이 한 생을 당당히 사는 사람은 없다. 저마다 이런저런 근심과 염려에 짓눌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게 인생이라. 그럼에도 염려는 안 하면 안 할수록 좋다. 그러자면 어찌해야 할까? 안 할 수는 없는데 가급적이면 안 할 수 있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는 오늘 말씀에서 그 단서를 얻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거면 우리의 나라도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 그런 우리에게 앞서 예수님은 언급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결국 염려의 근원은 먹고 사는 일에서 기인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데는 남들과의 비교가 따르고 누구와 다른 데서 오는 불안으로 인한 것이다. 그와 같은 염려는 우리 영혼이 득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 그러니까 염려의 근본 뿌리는 두 마음이다.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엄히 말씀하시길,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사는 일에 있어 돈에 마음을 두면 영락없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돈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그런 것이 악이다. 염려를 우리 주님은 방탕과 술취함과 같은 악독으로 놓고 다루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이른다는 것을 나는 이제 실감을 한다. 기껏 건강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몰골이 말이 아닌 경우를 본다. 듣기로는 잘들 사는 줄 알았는데, 우울증으로 집에 들어앉아 아무 것도 못하는 무기력으로 시달리는 누구도 보았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곧 자신의 약함을 알아야 한다. 나는 참 뻔뻔하게도 나의 빙충맞음을 감추지 않는다. 저들도 알만큼은 안다. 그래도 명색이 목사면 기도와 든든한 믿음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나는 이제 그런 허접한 요구에 시달리지 않는다. 빌빌하면 빌빌한 모습으로, 궁색하면 궁색한대로 누구의 전화를 받고 저를 위로한다. 그러니 나의 위로는 내 말이 아니다. 나를 따르라, 하는 소리가 아니다. 개뿔, 나도 내 코가 석 자라. 누구의 어려움을 듣고 위로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사람으로 살며 누군들 그럴 수 있겠나? 다윗인들 명색이 왕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면서도 저나나나 주 없이 살 수 없는 것은 도긴개긴이다. 그러니 나는 말씀 붙들자, 말씀으로 위로하심을 받고 말씀으로 이기자, 하면서 주께 돌린다. 도리어 저들에게 나의 약함이 위로가 된다면 얼마든지 나는 이를 숨기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이를 강조하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그러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무슨 말씀인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물음에 생각이 많아진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저절로 그리 되는 게 염려라,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7-28).” 하다못해 들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피어난 것 같아도 저것까지도 우리 하나님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게 피우시거늘,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9).” 그래서 이르시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고 되묻고 계시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다 아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곧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벌써 다 아신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염려하느냐, 이 말씀이시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결국 먼저와 나중의 원리였다.
염려를 아주 없이하고 살 수는 없는 게 인생이지만 굳이 또 할 수밖에 없는 게 염려라면 ‘먼저와 나중’의 일로 구분하면 되겠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심은 무얼까?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다. 여기에서가 아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마치 아등바등 기를 쓰고 소유하고 잃지 않으려 드니까 먼저가 이 나라가 되는 까닭이다. 내 아이? 내 건강? 내 돈? 내 시간? … 이를 내 것으로 여길 때는 영락없다. 주의 나라, 그의 소유를 구하는 것으로 먼저 해야 한다. 나는 누구를 위로하다 나야말로 누구보다 빌빌거리며 연약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구하고 찾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고백한다. 불안이 가중되어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보다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를 때가 어디 있겠나? 나로 하여금 이 아침에 졸음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 말씀 앞에 나를 세우게 하는 원동력이 불안이다.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경건하든 경건하지 못하든 좌우지간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불안이 나로 주 앞에 앉히고 염려가 나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한다.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한다. 그것으로 나는 나의 염려를 나중으로 미룬다. 자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나의 염려보다 먼저 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 나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맞추는 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나도 좋아하려 마음을 다한다. 여기저기 아프고, 또 무엇으로 마음은 저 혼자 난리를 부려, 어떤 날은 다섯 번 어떤 날은 여섯 번을 안정제를 먹는다. 그것으로 때론 몸이 나른하고 피로감을 호소한다. 기분은 꽝이다. 괜히 자꾸 울고 싶을 때도 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서럽고 억울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가지고 시비를 건다. 하지만 한 가지 바로 아는 요령은 ‘그러라고 두는 것’이다. 나는 다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그러려고 한다. 흉내라도 낸다. 누가 보면 우스우나 설교원고로 글을 쓰는 게 일주일 나의 업무다. 아침에 고작 묵상글을 쓰는 게 나의 하루의 일이다. 이를 위해 말씀을 찾고 누구와 이야기하다 메모를 하고 무엇을 보며 연관을 짓는다. 스스로도 가소로운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나의 먼저를 분명히 한다. 그럴 때,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리 받는다. 나도 나를 우습게 여긴다 해도, 다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아프고 힘들고 어디가 어때서 염려가 목을 조르고 숨통을 끊을 것 같다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첫째 비결은 ‘먼저’가 뚜렷하게 믿음으로 버틴다. 그 믿음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시는 주님의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마 6:30). 그 믿음은 ‘있어야 할 줄 다 아신다(32)’ 하는 지극히 분명한 사실이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을 더하신다(33)’는 확신이다.
아니면? 그랬는데도 아니면? 하고 내 안에 금세 염려는 또 다시 삐지고 드러나기 일쑤인데, 그럴 때면 가만히 욥의 신앙 고백을 따라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래,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하나님밖에 아뢸 분이 없다.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네. 그러나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밝힐 것이네.’ 우리 말 성경의 정직한 표현이 실감난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당연한 성경의 언약은 다윗도 바울도 끌어안고 이에 힘을 얻었던 진리다. 보면 다들 사는 게 죽을 맛이다. 친구의 슬픈 현실 앞에서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의 염려와 근심으로 내 코가 댓 발이나 빠져서 나야말로 제 앞가림도 못하고 사는 주제인데, 그럼에도 내가 저들 앞에서 감히 또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곧 우리의 염려란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끌어다 늘어놓고 혼자 찧고 빻고 난리를 부리는 것이다. 내일은 아직 오지도 않았고, 그것이 또 내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 한 날의 괴로움으로 족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주 단순하게 ‘여기까지’만 할 뿐이다. ‘할 수 있는 정도’를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고, 이것까지만 하고, 그래도 아직 내 한 발로 걸을 수 있고, 내 한 손으로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오늘 이 한 날의 족함으로도 됐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먼저와 나중’의 원리였다. 오직! ‘오직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너희에게 더해 주실 것이다.’ 나는 이방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권속이고 주의 자녀다. 주의 나라가 나의 나라다. 주가 일찍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으면 나도 아닌 것이다. 아닌 걸 두고 혹시나 하고 씨름하는 일들이 염려였다.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시는 주의 말씀 앞에서 다시금 어깨를 펴고, 그렇게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하는 고백으로, 그래! 오늘 하루의 족함을 삼는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