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전봉석 2021. 3. 27. 05:59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한복음 19:38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시편 4:5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기독교의 진리도 허사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구약에는 그때마다 피의 제사가 드려졌다. 그것은 짐승의 피였고 영구적인 속죄는 아니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3-14).”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구약의 성도들보다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십자가 없는 은혜는 없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는 정하신 바요, 모든 사람에게 예외는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7, 28).” 그리하여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들어서는 관문이고, 우리가 모여 서게 될 심판은 극심한 혼란의 자리가 아니라 주를 찬양하는 경배의 자리가 되었다. 이를 위하여 오늘 주님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 실은 순서에 따라 성경을 읽고 있지만 오늘과 같은 내용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여간 어렵고 죄송하고 속상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신 주께서 그와 같은 모욕과 참사를 당하셔야 했던 것이 누구를 뭐라 할 것이 아닌 나의 죄 때문이었다. 구약의 피흘림의 제사가 일시적이고 그림자와 같다면 오늘 예수의 죽으심은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죽음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오신, 사람 하나님의 죽음이시다. 사람이요, 하나님이신 이 죽음의 연합은 그저 다만 기이할 따름이다.

 

이것이 누구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더 없는 은혜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로 우리는 영원한 속죄함을 받았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그리하여 더는 나로 죄인이 아니다. 나의 그 어떤 의로도 주 앞에 설 수 없으나 나의 그 어떤 죄로도 내가 덧입은 의를 더럽힐 수 없다. 이는 온전히 선민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심판을 즐거워한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시 48:11).”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그것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나라의 권속이 되었다. 사람으로야 서로가 정들어 잠시 동안은 슬픔과 괴로움을 감출 수는 없으나 주의 자녀로서는 예비 된 면류관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우리로 경건의 유익을 알게 한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후에 이르러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이를 위하여 예수 십자가에 죽으셨다. 온갖 모욕과 저주를 담당하셨다. 모두가 나 때문이고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더는 죽음의 저주 아래에 놓인 자들이 아니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우리로 구원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이는 번복하실 수 없는 사실로서 그리스도의 의다. 오늘의 요한이 훗날 이 날을 기록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역사를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즉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로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처럼 누리며 통치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더하셨다. 이 모두는 오늘 본문의 이 끔찍하고 참혹한 세상을 예수께서 이기신 까닭으로다. 그렇게 시인은 노래한다. 이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다.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시 48:12-13).”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고 더욱 알고자 하는 것은 이를 자세히 보고 살펴 후대에 전하기 위함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이와 같은 말씀을 일주일 내내 묵상하며 다시 읽고, 다시 쓰고 한 것 같다. 지난 주일에 아버지가 오시는 주일이었는데, 탈장 수술 후라 경과를 보느라 이번 주일로 미루셨다. 수술 후 경과를 듣고 오시기로 하기 전까지 나는 말씀 준비를 했다가 미뤘다가 하면서, 시편 48편 본문 하나를 놓고 당겼다가 밀었다가 하면서 그때마다 여러 장의 원고를 썼다 지웠다 하기를 반복한 것이다. 아직 정리가 덜 된 내용이기는 하나, 어제는 바로 그 ‘시온’이 곧 ‘우리 자신’이 되었음을 주께서 열어 보이셨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역사는 단언컨대 우리의 구원이다. 나의 죄를 속죄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다. 이 땅에서의 안녕과 평안이 아니다. 우리도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사람은 얼마나 가증하고 역겨운가? 나는 특히 선거철만 되면 출마하는 정치인들을 보며 사람의 온갖 추하고 더러운 이중적인 모습 앞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다. 그런 게 저들만 그런가? 들춰지기 전까지는 모두가 교양 있는 교수고 어디서 존경 받는 인물들로 살았을 터이나 한낱 이 땅에서의 정치에서도 낱낱이 드러나는 몰골인데, 하물며….

 

주의 심판이 두려운 까닭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 속의 생각과 고약한 심보까지도 낱낱이 밝혀지는 일일 텐데, 그때의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감추고 어디에 숨을 것인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있으니 곧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씻음 바가 되었다는 소리다. 누가 재밌게 표현하기를 야곱은 형 에서의 옷과 냄새를 덧입어서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다. 그와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와 보혈을 덧입어 죄는 가려지고 의인으로 축복을 덧입은 것이다. 이는 괜한 추측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성경의 언약이다. 성경이 쓰인 목적이고 말씀이 존재하는 이유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천국 백성이다. 주의 의로 영원한 나라의 권속이 되었다. 이를 변경할 수 없고 무효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도 이를 취소하실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다.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부정하는 일이다. 그럼 하나님의 역사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게 된다. 고로 우리의 구원은 불가항력적이며 영구불변한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예수의 끔찍하신 십자가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으나 실은 이를 위하여 오셨다. 모든 성경을 응하셨다. 나의 구원은 이 위대한 역사의 결과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 믿음은 그와 같이 놀랍고 기이하며 불가역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오늘을 사는 데 있어서 경건의 날들을 성실로 준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수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제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산다. 이에 따른 두려움을 경외심이라 판단한다. 곧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움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면 은혜도 모른다. 감사도 할 수 없다. 시늉할 수는 있겠으나 진정한 기쁨은 알지 못한다. 성경은 되묻고 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행여 나의 이러한 마음도 두려움으로 점검하게 되는 이유다(슥 7:5-6).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뭐라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를 의식하고 기억함으로 남모르는 경외심으로 그의 은혜 또한 누릴 수 있는 자들이다. 육신의 질병이 또는 마음의 어려움이 날마다 우리를 들들 볶고 괴롭힌다 해도, 곧 죽음이 목전이라 임박한 만큼 두려움과 괴로움이 우리 목을 조이며 슬픔으로 짓누른다 해도, 그러므로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바라고 의뢰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참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그리하라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만 하기 싫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때론 회환에 젖고 아쉬움과 서러움에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지만 이는 모두 감상일 뿐, 정확한 사실은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서 오늘도 날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저는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 경이롭고 기이하며 놀랍기만 한 진리 앞에서 경외함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주의 은혜를 알 수 있겠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저는 비로소 예수를 장사하였다. 이제 우리는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 4:5).” 이것으로 성실하게 산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요삼 1:5-6).” 남은 생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란 주의 사랑을 전하는 자로 사는 일이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4).” 그러므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