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편 5:7
멀찍이 따른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예수 살아오신 그 자리에 같이 있지 못한 도마는 ‘여드레 동안’을 저들과 있으면서도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다. 오늘 주님은 도마에게 손수 못 박히신 손과 발을 만져보게 하시고 옆구리에 손을 대게 하신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십자가의 은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가장 결정적인 사랑이다. 베드로나 도마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러므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오늘 시편을 말씀을 이어 묵상하면 그 의미가 크다.
주를 경외함에 대하여 나는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는 것 같다. 두려워할 줄 알고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죄를 멀리하며 세상을 주의하며 살 수 있는 것이 복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언급을 이어서 보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 곧 우리의 죄는 피흘림이 전제되어야 했고 그때마다 동물을 잡아 일시적으로 반복되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의 보혈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하셨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더하여 영원히 복되게 하셨다. 그렇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살아서 죽음을 보기 전에 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한 번 용서하심을 받은 후에 더 이상 용서하심이 필요가 없는 것은 주의 보혈의 능력이다. 십자가 앞에 모든 죄는 사하심을 받았다. 사하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일 때이다. 그럼에도 안 믿는 자들에게는 그저 미련한 것일 뿐이다. 즉 내가 이제 이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를 묵상하면 할수록 내 안의 두려움은 성실함을 더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누가 보든 안 보든, 알든 모르든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일에서 아픈 것도 힘든 것도 남모르게 슬퍼하는 일에서도 성실하게 그 현실을 감당한다. 감히 말하지만 어떠하든 주를 바람이다.
어제는 종일 좀 아팠다. 아프다는 말이 참 지겨울 때도 있다. 날씨도 그랬고 마음도 늘어져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늘어졌다. 점심 때 집으로 와서 종일 누워 있었다. 아픈 게 일이라, 다들 나가고 혼자 있는데 서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였다. 마음은 늘 저 혼자 들고 까분다. 그것이 몸의 일이든 마음의 일이든, 아픔은 혼자 감당해야 할 뿐이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전 14:13).” 이를 누가 알아주겠나?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 23).” 누구보다 모든 걸 누리며 평안히 살았던 이의 고백으로는 참혹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7:3).” 이 땅에서 희희낙락 즐거움만 좇으며 사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행복은 언제나 헛될 뿐이다. 그리하여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저의 말을 좀 더 묵상하면 나의 슬픔까지도 일이다. 이것으로 구제하고 기도한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우리의 경건은 노닐듯 유유자적하면서 생겨나는 마음이 아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슬픔의 미학’이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많은 이들이 원망과 저주를 쏟을 때 우리는 간구와 소원을 주께 올린다. 그럴 수 있는 게 저들과 우리의 차이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혼자 있으면서도 괜히 모자라 안정제를 먹어대면서도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바람으로, ‘경건함으로 들으심을 받는다.’ 슬퍼도 주님, 하고 기뻐도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무덤에서 예수가 살아나셨다. 오늘 본문은 사라진 ‘예수의 시신’을 두고 혼란이 되었다. 베드로가 달려가고 막달라 마리아가 무서워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라지고 저를 쌌던 세마포만 남겨졌다. 성경은 이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실은 그런가? 수차례 예수님은 다시 사실 것을 가르치셨고 함께 계실 때도 이를 여러 번 강조하셨다. 하지만 부활은 우리 이해의 영역 너머다.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을 어찌 머리로 확신하며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뿐이다(11). 심지어는 그 뒤에 와서 서 계신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를 못할 정도로 상식 밖의 일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 그러니 성령이 아니시고는 어찌 이와 같은 말씀을 접할 수 있겠나? 우리는 다만 울며, 묻고, 헛되이 찾을 뿐이다. 비로소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실 때에야 우리는 보고 기뻐하며 안도할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주께서 우리에게 더하심은 평강이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슬픔이 있을 때도, 아픔과 고통이 실제 나를 억압하고 있을 때도, 그러한데도 어찌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더하시는 것을 종종 느낀다. 이게 어찌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심의 증거는 평강이다. 죽겠는데, 현실은 힘에 겨워 쓰러져 절망뿐이라 해도, 이상한 마음이다. 알 수 없는 자유함이다. 그것으로 죄사함의 능력을 체험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 예전에 그리 끌려 다니던 죄의식이나 죄책으로부터도 놓여났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것까지도 주 앞에 맡겨버린다. 나는 어차피 죄인이다. 이래도 더럽고 저래도 더럽다. 그런 나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용서하신 역사가 주의 십자가의 보혈이다. 하나님의 절대 희생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도 이를 번복하실 수 없다. 나는 송구할 따름이지만 이와 같은 진리 앞에서 안도한다. 나의 죄는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 도마다. 하필 저는 그 자리에 없었다(24).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 다른 이의 즐거움과 기쁨에서 저는 제외되어 있다. 그렇게 8일 동안을 어찌 지냈을까?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6).” 저에게도 결국 예수께서 직접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심지어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의심 많은 저에게까지 예수님은 참고 또 용인하신다. 그제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그때에 이 유명하신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곧 오늘 우리의 믿음이 저들보다 복된 것은 그것이다. 제자들은 명색이 직접 보고 들은 자들이며, 손으로 만지고 비로소 ‘믿음 없는 자’를 면하였다. 그러니 오늘 우리 안에 더하시는 믿음이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도리어 더 고통스럽고 힘들고 힘에 부쳐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서도 주를 바랄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감사함뿐이다. 안 믿어지는 일을 어쩌다 믿는다. 믿을 수도 없는 일을 어찌 또 구한다. 구함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알고, 앎으로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을 인정한다. 때론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주의 더 높은 차원의 희생과 사랑을 바라고 아는 것이다.
요한은 이와 같은 일을 기록하면서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0-31).” 다 기록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서도 말할 것 없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 저의 복음의 목적이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을 감당하는 무게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도대체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음을 붙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할 수 있겠나?
나는 종종 교회에 대해 험한 말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막말에 가까운 저들의 험담은 틀린 말이 아니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저들 속의 화가 또 조롱이 당연하다. 누군들 이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나? 아니면 적당히 마음의 위로 정도로 모든 종교를 아울러 좋게 좋게 여기고 말 것이지만. 나는 종종 몸이 아플 때, 또는 마음이 저 혼자 어려워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심지어는 금방 죽을 것처럼 공포를 느끼면서, 그와 같은 고통이 나로 하여금 주의 살아계심을 알려주는 신호 같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말이다. 그러니 누구에게 구할까? 무얼 바란들 저들 또한 자기들 일에나 급급할 따름이어서 애써 더는 구할 게 없다! 나야말로 얼마나 사람을 의지해보았나? 저들과 어울리며 얼마나 저들과 교제하는 것으로 그 즐거움의 낙을 삼으려고 했었던가? 누구는 나의 스승이었고, 목숨까지 내줄 수 있을 것 같던 친구요, 애인이요, 사랑하는 모든 사상과 가치와 나름의 보람들이었다. 한데 그것이 모두 바람을 잡는 일처럼 헛된 것을 알면서, 오늘의 나의 믿음을 나는 확신한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그러므로 나는 주를 두려워한다. 사랑하는 만큼 경외한다.
그러할 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 오늘 주신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안다. 아픈 것도 일이라. 슬퍼하고 좌절하는 것도 맡기신 사명처럼 여기며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으로 겸손을 배운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에 오늘 시편의 목소리로,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주께 아뢸 뿐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아멘.